의식(意識)의 도주 방향을 잃은 바람이 아무 데나 부딪치고 길가 수양버들이 말 갈퀴처럼 나부낀다. 겨울 노을은 보랏빛으로 스러지고 맨발의 까치들 눈빛이 슬프다. 끝까지 버티던 잡초들은 맥없이 쓰러지고 강제로 탈의당한 나무들은 애처롭다. 바람은 귓불을 숫돌에 문지르고 수운주는 가슴을 얼음조각으로 채운다. 오늘의 일은 데자뷔가 아니다. 의식(意識)에 기대어 대상을 추상하는 마음이 두려웠던 날을 여지없이 불러와서 아무도 없는 메마른 들판에 내동댕이친다. 이런 날은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징검다리 가지런히 놓인 냇가에 마른 갈대들이 물이랑처럼 너울거리고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하늘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꽃 송이를 퍼부을 때면 우윳빛 얼굴의 앞집 소녀가 하얀 이빨을 반짝이며 눈웃음 짓던 정겨운 마을이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