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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대하여

추석에 대하여 고향집 빈 우물에는 달빛이 고여 있었고갓 내려온 빛이어서 해맑았다.몇 개씩 여는 대추나무는그해도 인색한 열매를 내주었고나는 달그림자 앞에서 내 나이를 세고 있었다.어머니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들은왜 하나같이 그리움을 닮았는지감자송편을 빚을 때마다어머니는 어떤 그리움을 접어 넣었고나는 그 손끝을 바라만 볼 뿐 침묵했다. 낡은 신발들이 댓돌 위에 앉아자기들끼리 몰래 나눈 말이 있는 듯불빛 아래 잠시 환해졌다가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두워졌다.보름달은 한 해 열두 번이나 뜨는데사람들은 팔월에 뜬 달에 얼굴을 걸어두고그 얼굴 곁에 오래 머문다.나는 그것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그렇게 생각하는 나 역시매년 추석에 뜨는 달을 기다린다. 갈대는 늘 흔들리는 것이 일이어서사람들은 그것을 약하다고 말하지만갈..

나의 창작시 05:22:14

마음의 쓴 뿌리(Root of bitterness)

마음의 쓴 뿌리(Root of bitterness)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상처와 오해, 불합리한 상황을 맞닥뜨린다. 그때 마음에 남은 서운함과 분노를 제때 털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영혼 깊은 곳에 가라앉아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성경은 이 상태를 향해 ‘쓴 뿌리’라는 매우 직관적이고 경고성 짙은 비유를 사용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히12:15),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경고한 ‘쓴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땅 밑에서 은밀히 자라나 결국 삶 전체의 열매를 망치는 치명적인 독소다. 영적인 시각에서 쓴 뿌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단단한 장..

박인걸 컬럼 2026.09.23

어떤 늙은이

어떤 늙은이 시침(時針)에 매달린 태양이 돌고세월은 동그라미 속에서 어지럼을 느끼며안단테 혹은 프레스토로 멈추지 않고달려온 지점에 한 노인이 서 있다.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두 귀를 곤두세우고막대기 끝에는 발끝을 세웠다. 별은 손에 잡으려 아등바등하며눈물의 골짜기를 건너와 보니 노옹이 웃는다.실타래처럼 얽힌 밤길에서깨알 같은 공감각의 수수께끼를 해석하며촉각결여증에 설리면서 도달하였는데난청 늙은이가 고목 곁에 서 있다. 마라토너의 끈질긴 집념으로헉헉대며 대관령을 넘어온 것이올림픽 월계관이 아니었다.뒹구는 쭈그러진 밤송이 하나였다.허수아비 초라한 발목이어느 공동묘지 앞에서 서성인다. 진달래는 죄 없이 붉게 피어나는데꽃잎 져버린 자리에 바람만 문을 두드린다.뒤돌아보니 길은 없었고 다만 가벼워진 그림자 하나 서..

나의 창작시 2026.09.23

싸리 꽃 필무렵

싸리꽃 필 무렵 홍보랏빛 싸리꽃이억새풀 언덕에 곱게 피던 날서글픈 가을빛은 굽은 산자락에 서리고풀벌레 애련한 울음이어느 여인의 흐느낌처럼 들린다.뒤돌아보면 해마다 찾아오는 가을인데주름 깊은 나그네 눈에는슬픈 노래의 끝부분처럼 와닿는다. 빈 풀숲에 풀썩 주저앉아흘려보낸 그리움들을 거둬들여기억의 좌판에 진열하면버릴 것 하나 없는 꽃잎으로 반짝인다.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때론 헤어졌던 아픔들까지나를 나 되게 한 은혜였고싸리꽃만큼이나 고운 이야기들이었다. 가을로 치닫는 산기슭의 정취는삶의 이야기들을 무르익게 하고싸리꽃마저 모두 지고 나면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보게 되려나. 2021.9.17

나의 창작시 2026.09.22

소(牛)

소(牛) 信士(신사)/박인걸차라리 한 마리 소가 되어멍에 메고 밭을 갈고달구지 끌고 언덕길을 오르고등짐 지고 산길을 가다가외양간에서 잠을 자고주인이 주는 여물을 먹고주인이 때리면 맞으며우시장에서 낯선 사람에 팔려새 주인을 섬기다가어느 날 도살장에서 사라진다면 어떨까.희로애락의 감정에 널뛰지 않고시련이나 비련의 곡절 없이성공과 실패의 기로(岐路)에서칼끝처럼 파고드는번민과 갈등의 늪에 빠져비탄의 한숨을 토하지 않아도 되는한 마리 소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선택과 결정의 고민 없이눈물과 회한으로 잠 못이루지 않는미래의 충격을 미리 예측하거나과거의 실수를 반추하지 않아도 되는한 마리 소가 사람보다 낫지 않을까.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늘 불안하다.2022. 9. 18

나의 창작시 2026.09.21

가을 아침

가을 아침 信士/박인걸 해가 떴어도 어두운 목구멍처럼 아침 안개는마을 어귀에서 제 가슴을 찢고낡은 자전거 페달 위에는 찬 이슬이 내린다.누군가 버린 이름 위에는 침묵이 맴돌고각자는 주머니에서 식은 손을 덥힐 때계절은 차가운 계단을 무겁게 내려간다. 주인 잃은 개는 자꾸 뒤돌아보다 멀리 달아나고살아온 날들은 흙 위에 남겨진 바퀴 자국처럼 흐려진다.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은 밤새 낮은 목소리로 울고바람은 빈 우체통에 붉은 혀를 밀어 넣다가녹슨 난간에 묻은 시간의 손때만 만지고 간다. 기운 지붕 위에 가을 햇살의 파편이 떨어지고우리가 치러야 할 슬픔은 늘 가불이었다.허기진 비둘기의 눈동자처럼 굳어버린 아침에나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 간이역의 시계를 바라본다.생의 상처는 안개 속에서만 푸..

나의 창작시 2026.09.20

모월(某月) 모일(某日)

모월(某月) 모일(某日)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비는 아직 구름에 갇혀있다.바람은 나뭇잎 위에서 잠들고봄 가뭄에 말라죽은 회향목이 서럽다.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과목적 없이 배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는 어디쯤 왔는지 알지 못한다. 배롱나무꽃이 마지막 잎을 떨어트리던 날불자동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고검은 연기가 기둥처럼 일어서서무너지려는 구름을 떠받친다.순간순간 일어나는 삶의 장면들이어릴 적 의미 없게 관람하던 활동사진처럼 펼쳐지고이유도 없이 치미는 부아를 참으며바람에 꺾인 오동나무 아래 나는 잠시 머문다. 못생긴 달팽이 한 마리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사를 한다.스무 번 넘게 이삿짐을 싣고부스러기를 흘리며 다닌 내가 가엽다.아직은 코스모스가 곱게 피어 위로가 된다.긴 목을 빼 들고 하늘거릴 때어머니의 ..

나의 창작시 2026.09.19

무제(無題

무제(無題) 信士(신사)손가락을 꼽으며 세월을 세어보면어디쯤 세다가 숫자를 잊어버린다.손가락 하나를 일 년으로 셀 때면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나를 붙잡아서다.아름다운 추억 못지않게아픈 기억들도 지폐처럼 넘어간다.갈피갈피 끼워 둔 기억의 엽서가하도 많아 몇 해를 세어도 끝이 안 날 것만 같다.나의 저녁 거리에는 그림자가 왕래하고가물거리는 가로등에는 내 눈동자가 걸려있다.빼곡하던 밤하늘 별들이저 하늘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내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낯선 땅이었고가파른 사다리 마지막 칸을 디딜 때면미끄러지는 꿈을 꾸면서아직도 어느 파도 위를 걷고 있다.여러 갈림길에 서서길을 물을 사람을 찾아보지만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지 않는다.휴대전화에 번호를 입력하지만아무리 숫자를 눌러도 ..

나의 창작시 2026.09.18

슬픈 가을

슬픈 가을 길을 걷다가 나는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한다.바람은 여름의 이름을 지우며 지나가고낙엽은 누군가 읽다 만 편지처럼 구겨졌다.저녁 그림자가 내 옆에 길게 서 있을 때가을은 슬픔을 데리고 온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한 계절 뜨거웠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불빛 꺼진 창문마다 사람들의 하루가 접혀 있고나는 창문을 세다가 내 것은 몇 번째인지 잊어버린다.길은 점점 어둡고 걸어온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가을은 언제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로 온다. 이맘때면 고독은 습관처럼 내 어깨에 내려앉고나는 일부러 그것을 밀어내지 않는다.무표정한 사람들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거리에서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사람이 된다. 삶은 결국 지워지는 목록이 아니었을까.젊음도 사랑도 계절처럼 왔다가 소..

나의 창작시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