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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白露)

백로(白露) 거미줄에 이슬방울이 가득 맺힐 때나는 또 한 번 찾아온 가을을 만난다.아침 안개가 원미 산 중턱을 맴돌고풀잎에 고인 이슬이 눈물처럼 쏟아지려 한다.누가 찬 수증기를 밤새 끌어다 놓았을까.하지만, 나뭇잎 흠뻑 적신 이슬도햇살 한 줌에 제 몸을 지우고 만다.진주보다 아름답던 백로(白露)라 해도해가 뜨면 흔적 없이 사라질 때나는 오래전 떠나보낸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그리움은 늙은 짐승처럼 웅크린 채발길이 뜸한 골목에서 숨을 거두고우리는 저마다 어떤 슬픔을 등에 업고아침에 사라지는 안개처럼 걸어갈 뿐돌아보면 발자국도 안개 속으로 지워진다.어차피 찬란함은 모두 지나간다.그래서 가을은 하얗게 우리를 지우러 온다.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저녁녘에나는 이슬 한 방울처럼 힘없이 떨어지겠지.아, 어제는 슬프지..

나의 창작시 03:22:27

가인 컴플렉스

가인 컴플렉스 인류 최초의 비극은 에덴동산의 추방이 아니라, 인류의 첫 번째 가정에서 벌어진 형제간의 살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이로 인해 가인은 심히 분노하여 얼굴이 변하였고, 결국 하나님이 금하신 선을 넘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치고 만다. 여기서 착안한 ‘가인 컴플렉스(Cain Complex)’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시기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결국 파멸적인 분노로 치닫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완벽한 가인 컴플렉스의 온실이다. 우리는 손안의 작은 화면을 통해 타인의 성공, 행복, 재산, 심지어 삶의 태도까지 실시간으로 훔쳐본다. SNS라는 거울 앞에서 현대인들은 늘 부족함을 느끼고,..

박인걸 컬럼 2026.09.08

백로(白鷺)

백로(白鷺) 들녘에는 가을이 빈터처럼 차갑다.늙은 나뭇잎으로 기어드는 풀벌레 울음누군가 버리고 간 깡통처럼 쭈그러진 모습의털 빠진 새 한 마리 벚나무 가지 끝에 위험하게 앉아내 유년의 슬픔처럼 움직이지 않는다.산을 넘지 못한 노을이 들판에 서성일 때바람에 찢긴 풀잎 위로 스며드는 지독한 공장 굴뚝 내음가끔 고개를 빼 들고 슬픈 울음 우는 것은누구를 기다려서가 아니라살아온 날들의 아픔에 대한 독백(獨白)이다. 가장 아픈 단어만을 골라 쓴 편지처럼더는 비상할 용기마저 접힌 날개 날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새는 긴 목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비워 내는 마음이 얼마나 서글픈 거짓말인가.비울수록 더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앙금 속에서 부천공단의 녹슨 먼지가 저녁의 입술을 막아설 때늙은 새는 비..

나의 창작시 2026.09.08

잎사귀들

잎사귀들 잎사귀들이 모두 찢긴 건 아니다.벌레에 갉히고 바람에 찢긴 잎들은어쩌다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우거진 수풀을 헤쳐 들어서면잎사귀들이 잡티 하나 없이 곱고 씩씩하다. 우윳빛 소녀의 얼굴처럼녹색 물오른 이파리들의 원형을 보노라면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경구(經句)가 떠오른다. 서걱거리며 출렁이는 갈댓잎들과누워서 안연히 살아가는 칡잎들식물 백과를 들춰야 알아낼 이름의 풀들이논산훈련소 병사들처럼 싱싱하다. 한여름 폭풍이 풀대를 잡아당길 때도자기들끼리 견디며 살아남고가을이 되면 형형(炯炯)한 빛깔로곱게 늙으며 길게 눕는다.숲이 저토록 푸른 건 억척같이 살아 준 잎 새 들 덕분이리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잎사귀들이지만고운 빛을 잃지 않은 저 잎들처럼나 또한 그런 삶을 살아내야 하리라..

나의 창작시 2026.09.07

물에 빠트린 도끼(왕하6:1-7)

물에 빠트린 도끼(왕하6:1-7) (서론) 사랑하는 원장님과 교수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장교로 부르심을 받아 이 거룩한 학교에 모인 학우 여러분,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며 드리는 이 개강예배의 자리에, 물에 빠진 우리의 도끼를 건져 올리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오늘 본문 열왕기하 6장은 엘리사 신학교 선지 생도들의 아주 활기차고 사명감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당시는 아합과 이세벨의 혹독한 우상숭배 정책이 있은 후, 엘리사의 영적 지도력 아래 선지 학교가 급격히 부흥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모여든 신학생들의 수가 너무나 많아져서, 그들이 거하던 처소가 좁아질 정도였습니다.그들은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각..

가을의 방랑

가을의 방랑 빌딩 숲을 휘돌아 온 바람이내 낡은 옷자락에 땀을 닦는다.언어를 잃어버린 저녁이학생들 사라진 운동장에 침묵을 밀어 넣을 때나는 습관처럼 멈춰 서서 사라지는 계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한때 거침없이 달아오르던 열병들은이제 차가운 재의 형상으로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 위에 흩어져 있다.나는 부서지는 잿빛을 짓밟으며 걷다가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되뇌며되돌아갈 수 없는 그 계절의 그늘 속에서오래도록 환각처럼 서성인다. 아직 버리지 못한 소멸의 시간들이흉터 같은 뒷모습으로 나를 추적하며어두워지는 골목마다 내 목을 죄고 있을 때늙어버린 방랑자처럼, 혹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나는 지나온 길을 가만히 뒤돌아본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영혼을 이상하리만큼 그리워한다.가을은 나를 무참히 통과해 ..

나의 창작시 2026.09.06

그곳 풍경

그곳 풍경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나뭇잎 위로 노을 조각이 별처럼 쏟아지고아직 땅거미가 내리기 전병풍처럼 둘러선 산과 산 사이에는장엄한 고요가 교향곡처럼 흘렀다.붉은 수수가 알알이 여물고여문 강낭콩 넝쿨은 장대를 타고 오르고고개 숙인 벼 이삭 누레진 들판에는해마다 쌓인 신고(辛苦)의 보람이 자욱했다.내가 몽정 소년이 될 즈음에는영혼이 햇순처럼 순해서어린 눈에 비친 그곳 들판에는밀레의 만종 소리가 출렁거렸다.억수장마를 이겨낸 풀잎들과작렬하는 태양의 시련을 견디며보랏빛 눈물을 떨구고 피어난 나팔꽃들의소리 없는 함성이 울려 퍼지던그곳, 이맘때가 사무치도록 그립다.2021.9.8.

나의 창작시 2026.09.05

도시의 가로수

도시의 가로수 아스팔트 밑을 두더지처럼 쑤시는 뿌리매연과 번잡한 바퀴 소리를 들으며목마른 입술을 열어 온갖 먼지를 삼키는 나무푸른 잎사귀마다 말없이 흔들리는이 나무를 누가 길가에 죄수처럼 형벌을 내렸나. 마천루 거대한 빌딩의 그늘태양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길모퉁이철제 울타리에 갇힌 기형의 발목으로 비틀대며대형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는 진동에도너는 가지를 뻗어 하늘을 겨누는구나. 웃자란 가지마다 참수를 당할 때면잘려 나간 가지마다 흘러내리는 눈물말없이 잘린 팔다리를 품고삭막한 보도블록 위에 서서죽은 듯 살아야 하는 서글픈 파수꾼이 된다. 갈기갈기 찢긴 잎에 가을 서리가 내릴 때황갈색 병든 잎을 맥없이 떨구며비로소 가슴을 열어 시퍼런 가시를 드러낸다.콘크리트 심장을 끝내 뚫지 못해도도시의 화려함 속에서 ..

나의 창작시 202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