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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들국화 원미 산 등산로에는 청초한 들국화가지난밤에도 찬 이슬 맞으며저물어 가는 가을을 온몸으로 입는다.꽃이 지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제 몫의 빛을 다 건네고 얻는 고요이리. 바람이 산기슭을 사정없이 휘저을 때나는 그 곁에서 오래 묵은 슬픔을 헤아린다.피어나는 일과 저무는 일이 한 몸이라면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묻다가묻는 일마저 이슬처럼 가벼워지는 새벽녘 누구를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는 듯꽃은 다만 존재함으로 온전하다.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도 향기는 허공을 건너고존재란 증명받지 않아도그 자체로 충분한 것임을보랏빛 꽃송이가 말없이 가르쳐 준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깊이 땅을 움켜쥐고꽃잎은 서릿발이 일어서도 의연하다.나 또한 한 송이 고운 불씨로 남아끝내 꺾이지 않는 생명 또한 아름답다고저무는 들..

나의 창작시 04:31:29

늦가을 비

늦가을 비 어두운 거리에 회색 빗방울이 뒹군다.그것들은 버려진 유리 조각처럼 쉽게 깨지며가로등이 드리운 흐릿한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길 위에는 발길에 밟힌 은행잎들이어릴 적 부스럼의 진물처럼 노랗게 번져 있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빗물을 밟으며불만으로 가득 찬 가슴을 닫은 채땅에 떨어져 아파하는 빗방울의 비명을 듣는다.그것들은 땅에 닿자마자 비명을 거두고깊은 고요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한때 우리가 좋아하며 부둥켜안았던 것들도결국 저렇게 흔적 없이 짓물러 사라져 가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다정했던 순간들은축축한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다.우산 하나 없이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가을은 텅 빈 가방처럼 속을 비운 채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내 기억의 아픈 자리에는어릴 적 군대 가서 죽은 형의 유골함..

나의 창작시 2026.11.02

단풍 절정

단풍 절정 붉음이 절정에 이른 날나는 산기슭에 서서단풍나무가 제 생을 태우는 소릴 듣는다.저토록 찬란함이 이별의 빛깔인지삶을 향한 애착인지 몰라 묻지 않기로 한다.다만 고요한 불길 앞에 오래 서 있을 뿐이다. 연둣빛 봄을 건너 여름의 초록을 지나서야잎은 비로소 제 안의 붉음을 알게 되는 걸까.아픔을 견딘 자리에서 피어나는 빛과상처가 깊을수록 짙어지는 색깔은깊어진 연륜에야 제 얼굴을 드러내나 보다. 바람이 한 번 지날 때마다 잎 하나가 진다.떨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이라고누군가에게 들었지만, 가슴은 아직 서늘하다.젊음도 사랑도 이렇게 소리 없이 내려앉아오래 걸어온 발밑에 붉은 길을 깔아 주었다. 절정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순간에 있다.다 타오르고 나서야 나무는 가벼워지고빈 가지 사이로..

나의 창작시 2026.11.01

피조물의 노래

피조물의 노래 시편 104편을 묵상하며 하늘은 한 장의 비단처럼 펼쳐지고태양 빛은 그 위에 걸린 투명한 드레스다.바람은 거대한 숨결을 싣고계절의 문을 조용히 여닫으며세상의 잠든 심장을 뛰게 한다. 대지는 깊은 침묵으로 뿌리내리고바다는 산의 허리를 감싸안는다.보이지 않는 창조주 목소리에바다는 잠잠하고 골짜기는 길을 내어세상의 경계마다 질서가 흐른다. 바위의 뿌리에서 샘물이 터지면목마른 짐승들이 찾아와 목을 축이고새들은 숲속에 저마다 집을 짓는다.하늘의 빗방울이 대지의 깊은 잠을 깨우면산야는 초록의 화판을 가득 채운다. 풀잎은 짐승들의 하루 양식이 되고곡식은 매일 사람의 식탁이 된다.포도주는 마음의 그늘을 걷어 내고기름은 얼굴에 윤기를 돌려주며빵 한 조각은 내일을 살아 내게 한다. 해는..

신앙시 2026.10.31

시대를 분별하라.

시대를 분별하라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라며 강하게 질책하셨다. 하늘의 빛깔을 보고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는 미물적 지혜는 가지면서도, 정작 하나님 역사의 큰 줄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읽어내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예수님의 이 준엄한 경고가 어느 때보다 뼈아프게 와닿는 시대다. 지구촌 곳곳을 둘러보면 전 지구적 혼란과 위기의 징후들이 선명하다. 정치적 극단화는 대화와 타협의 장을 파괴했고, 국제 정세는 외교적 대화보다 군사적 패권과 실력 행사가 앞서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장으로 변했다. 세계 경제와 무역 질서는 국경 없는 협력의 시..

박인걸 컬럼 2026.10.30

추운 날의 기억

추운 날의 기억 남가좌동의 낯익은 하천 변에는가을 잡초가 버려진 누더기처럼 조용히 썩어갔다.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 잎들은빠르게 달아나는 자동차 뒤편으로 흩어졌다, 낡은 가로등들이 하나둘 켜지던 시간나는 어두워지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마다내 가슴 깊은 곳에서 쇠꼬챙이 같은 한기(寒氣)가 솟구쳤다.손에 쥔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던 나는단칸방에 갇혀 있던 아내의 투명한 눈동자와철없는 네 살배기 어린 아들의 눈빛이어둠 속에서 환등기처럼 켜졌다가 꺼졌다. 움직이는 깡통 같은 시내버스 창문에 이마를 대고나는 낯선 헬라어 단어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 낮에는 허기를 팔고 밤에는 졸음과 싸우며교실 맨 뒷자리에 매달려 보내던 시간들자정에야 겨우 셋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

나의 창작시 2026.10.29

은행나무 잎의 철학

은행나무잎의 철학 샛노랗게 물드는 일이 떠날 채비임을잎은 가을이 되어서야 알아차린다.초록빛 푸른 날들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묻지도 못한 채 노란빛만 깊어 가는 것을나는 멀리 서서 바라본다. 바람은 떼어 놓으려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갈 뿐인데매달려 있던 시간이 스스로 손을 놓는다.떨어지는 모양도 저마다 달라서원을 그리기도 하고 곧장 내려앉기도 한다.생을 마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땅에 닿은 노란 잎은 끝이 아니라쌓여 다시 길이 되는 금빛 융단을 깔고밟히면서도 제빛을 내어주는 침묵 앞에서사라진다는 것은 지워지는 것과 달라서나는 소멸도 한 장의 고요로 남는다고 믿는다. 오늘, 잎을 보내고서도 서 있는 자여잎을 내려놓은 가지가 하늘을 더 깊이 품듯잃고 나서야 뿌리의 깊이를 헤아리는 날이 있다.우리는 모두 한..

나의 창작시 2026.10.28

그날 아침(1979년 10월 26일)

그날 아침(1979년 10월 26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시장 바닥에 팽개쳐진 호외(號外)신문들은채 마르지 않은 눈꺼풀처럼 무겁게 닫혀 있었다. 새벽 공기마저 차가운 노량진 본동 시장 골목엔상인들의 웅성거림이 얇은 유리 조각처럼 부서졌다.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상기된 목소리는시멘트처럼 굳어가는 시대의 아픔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것이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이라는누구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할 거대한 충격이었다.내 주머니 속에는 두꺼운 헬라어 단어장과어제 풀다 만 낡은 연습장이 구겨져 있었다.주경야독의 고달픈 만학도는어둡고 좁은 셋방에서 악착같이 버티던 내 청춘의 바닥이그 한 발의 총성으로 아득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으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다들 멍하니 서서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 거대..

나의 창작시 2026.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