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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390

그 마을 이야기

그 마을 이야기 까칠봉이 까맣게 일어섰고 깃대봉은 하늘과 맞닿았다. 점점이 흩어진 우람한 산맥이 푸른 파도처럼 흘러내리고 미인송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는 국경 없는 새들이 모여 노래 불렀다. 꽃비 내리던 봄날 향기에 취하고 여름 장맛비는 그리움만 키우고 가을 단풍잎 곱게 염색할 때면 어린 소년은 숲길을 걸으며 꿈을 주웠다. 흰 눈이 처마까지 쌓일 때면 고립된 마을에는 산 노루가 가족이 되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을은 사라지지 않는 신기루였다.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 한 대에 마을 아낙네 늦은 밤까지 모여앉아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 울고 웃었고 황금심의 노랫가락에 혼이 빠졌다. 종교인보다 더 선한 이웃이 숟가락까지 챙겨주며 모여 살았고 양심법 하나만으로 충분한 그 마을은 나의 이상향이었다. 2023.1.26

나의 창작시 2023.01.26

맹추위

맹추위 눈구름 한 점 없는 맨 하늘에서 차가운 기운이 쏟아진다. 머리맡에 둔 물 양재기 꽁꽁 얼었던 그 해 겨울보다 더 춥다. 추위에 굼뜬 비둘기가 차에 치였고 지하 주차장에 피란 온 길고양이 눈치만 본다. 쪼그만 새들은 멀리 도망치고 마당 옆 목련 나무는 체념의 빛이 역력하다. 한파 주의보는 종일 전파를 타고 제주에 발이 묶인 승객이 가엽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수시로 불어 닥친 맹추위를 견디었다. 새벽 네시에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교를 건넜고 하루 연탄 한 장에 목숨을 맡기고 세 식구가 그 해 겨울을 보냈다. 아이앰에프 외환위기에 내 영혼을 장대에 매달았고 한여름 내내 등골에는 찬 서리가 내렸다. 곤파스가 수도권을 강타하던 밤 육십자 종탑에 기어올라 바람에 흩날리는 철판을 붙잡고 울었다. 영하 ..

나의 창작시 2023.01.24

재래시장

재래시장 돼지껍데기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원미동 재래시장에 간다. 쫄깃쫄깃한 껍데기 볶음은 소가죽처럼 질기지 않아 맛있다. 용산 굴다리 너머 재래시장에는 청과 채소가 산더미를 이루고 꼭두새벽 아르바이트를 뛰던 시절 단백질보충이 돼지껍데기였다. 한겨울 찬바람은 살갗을 파고들고 세차게 휘날리는 눈발은 작은 의지를 꺾곤 했다. 치열한 생존의 땀냄새는 겨드랑이 아래서 샘처럼 솟았지만 생존과 직결된 몇 푼의 지폐를 위해 그해 겨울 손수레를 끌어야 했다. 시장쓰레기 썩는 냄새가 점막을 자극하고 상스럽고 거친 욕지거리가 난무해도 손수레와 사람이 뒤엉킨 시장에는 인간다움의 정이 흘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시장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가까운 재래시장을 찾아가 그때 그 냄새를 다시 들이마시며 꿈을 키우던 초심을 되..

나의 창작시 2023.01.22

회한(悔恨)

회한(悔恨) 흘러간 시간을 어디서 찾으랴. 주어진 재물을 낭비함같이 붙잡지 못한 시간이 마냥아쉽다. 꽃이 피고 지던 날에 시간의 묘기에 관심이 없었고 밤과 낮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 정확한 시간이 작동되는 걸 잊었다. 내 젊은 날의 초상(肖像)은 별처럼 빛날 줄 알았고 총명했던 뇌의 기억 장치가 뇌진탕에 스러질 줄 몰랐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시간을 아끼라.’하던 시구(詩句)를 잊었던가. 밝던 태양은 햇무리에 갇히고 시간에 갉아 먹힌 하현달이 불쌍하다. 흘러간 시간의 자국마져 봄눈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되돌아갈 길은 찾을 수 없다. 두 개의 동공에 점안액을 집어넣어도 시간의 창문은 모두 닫혀있다. 섣달그믐에 나는 오뇌(懊惱)할 ..

나의 창작시 2023.01.21

설날

설날 신정(新正)은 해의 생일이고 구정(舊正)은 달의 생일일까. 서로 다른 두 항성의 출생을 누가 알랴만 신정은 신정대로 구정은 구정대로 좋다. 지구는 태양 위를 삼백육십오일 걸어가고 달은 지구 위를 삼백오십사일 걸어간다네. 지구는 낮길 이라서 빨리 걷고 달은 아마도 밤길을 걷느라 더딘 거겠지. 천고(千古)의 무궁한 시간을 언제까지 두 별은 걸을지 모르지만 두 광명을 하늘에 이고 사는 우리네야 설날을 두 번이나 맞으니 어찌 안 기쁘랴. 어느 해는 설국(雪國)에서 새 아침을 열고 때로는 혹한(酷寒)에 맞지만 두 설은 언제나 희망을 선물해서 좋다. 헝클어진 삶을 어제의 시간에 파묻고 새로운 결의로 첫날을 맞으니 좋다. 한 해가 또 복잡하게 뒤섞일지라도 설날은 모든 것이 새것이라서 마냥 기쁘다. 새 하늘, 새..

나의 창작시 2023.01.20

늙는 병

늙는 병 아파트모서리 격풍이 울고 겨울 가로수 몸서리친다. 세찬 눈보라에 지친 비둘기 겁먹은 눈동자 떨리는 가슴 섣달 혹한은 무자비하고 도시 전체가 한(寒)섬이다. 모락모락 오르는 굴뚝 연기 건넛마을 울리던 떡메질 소리 산촌을 깨우던 수탉울음 아스라한 기억도 소음에 묻힌다. 어쩌자고 자꾸만 역주행하여 옛날 풍경을 소환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늙는 병인터 그럴지라도 그리운 건 그리운 거지 2023.1.19

나의 창작시 2023.01.19

겨울 비

겨울 비 겨울비는 언제나 을쓰년스럽다. 이런 날에는 고달팠던 기억을 호출한다. 낡은 리어카에 사과를 싣고 동부이촌동 어느 골목길에서 갑자기 쏟아진 겨울비를 맞으며 오돌오돌 떨던 때가 舊正 무렵이었다. 苦學生 신분에 본전을 잃어버릴까 봐 사과 한 개도 금쪽이었다. 변변찮은 입성에 간드레불에 손을 녹이며 밤늦게까지 떨이를 외칠 때면 겨울비는 나의 꿈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초라한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얼굴들과 동정의 눈빛으로 과일 한봉지를 팔아주던 아저씨, 통행 금지 싸이렌이 울리기 전에 리어카 보관소로 달려야 했던 그시절 항상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렸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언제나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지만 잃어버린 本錢은 나의 의지를 키우는 학비였다. 지금도 동부이촌동 철도 건널목에 비에 젖은 열차..

나의 창작시 2023.01.17

어떤 삶

어떤 삶 길 없는 길을 걷는 일과 물 없는 내에서 물을 찾는 일은 고달프다. 폭설에 길이 지워진 것도 아니고 가뭄에 냇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어쩌자고 나는 고집을 부리며 억지 열성으로 살았을까. 시간의 짐을 나 홀로 짊어지고 밤하늘의 별을 손에 잡으려 했을까. 칠흑의 밤은 아침을 열어주지 않았고 사막에는 결국 꽃이 피지 않았다. 무수한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속살까지 보여주던 꽃이 그립다. 석양은 산산히 부서지고 간신히 찾은 길에는 어둠이 내렸다. 이제는 더듬거릴 용기도 없고 희미했던 손끝의 지문도 사라졌다. 낡아 무너진 돌담길에는 깨진 사금파리만 발에 챈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말한다. 섭험(涉險)의 길은 즐거웠다. 2023.1.16.

나의 창작시 2023.01.16

눈 소나기

눈 소나기 오랜만에 내리는 폭설이다. 어떤 목마름에 침만 삼켰는데 아직도 흡족하지는 않지만 쏟아지는 눈이 마음의 갈증을 풀어준다. 시답잖은 눈은 부화를 돋운다. 찔끔찔끔 주는 코로나 지원금처럼 감질나게 뜸들이지 않고 화끈하게 퍼부으니 속이 시원하다. 낙하산 하나 등에 걸머메고 구름위에서 뛰어내려 흰 눈처럼 허공을 마음껏 날아 세상 끝까지 탐색하고 싶다. 지저분한 거리를 밟고 지날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공격기제의 응어리들을 눈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 하얀 눈속에 깊이 파묻고 싶다. 2022.12.16

나의 창작시 2022.12.17

달빛

달빛 앙상한 나뭇가지에 차가운 빛깔로 몸을 숨긴 보름달이 새벽기도 올리러 가는 나를 부지런히 따라온다. 며칠 전만 해도 반쪽이었는데 잃어버린 조각을 어어붙이고 밤새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러운 빛으로 내 등을 떠민다. 플라타너스 잎마저 모두 떨어져 을씨년스러운 새벽 골목길에 누이처럼 복스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어주니 힘이 솟는다. 캄캄한 세상에 홀로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삶은 고달파도 누군가에게 희망과 위로가 된다면 나도 달빛처럼 살고 싶다. 2022.12.10

나의 창작시 202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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