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나의 창작시 1374

아내(畵)

아내(畵) 클래식 레이디 액자 안에 사뿐사뿐 걸어 나올듯한 여인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처럼 빛난다. 자수정 빛 블라우스에 수공예 벨트로 느슨하게 두른 가는 허리 안아주고 싶은 가녀린 어깨 봄 향기 물씬 풍기는 미소에 반한다. 흑색 유멜라닌 흡족한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어깨 위로 흔들리고 양 겹 초승달 눈썹이 이슬 맺힌 눈동자 위를 감싼다. 흠도 티도 없는 백옥 빛 얼굴 위로 명주실처럼 윤기 자르르 흐르고 미소 머금은 앵두 닮은 입술에 사랑이 철철 흘러넘친다. 그대는 갓 피어난 호접란 꽃잎에 앉은 한 마리 코발트불르의 물포나비 둥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극락조 한 마리라오. 2023.2.3

나의 창작시 2023.02.03

슬픈 눈(雪)

슬픈 눈(雪) 일렬로 서서 도시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에 함박눈이 벌떼처럼 덤벼들고 두꺼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멀리 사라진다. 노량진역 앞길에 늘어선 플라터나스가 오돌오돌 떨던 그해 겨울에는 함박눈이 내가 탄 시내버스를 따라왔고 봉천동 달동네 재래식 화장실에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던 그해 밤에는 싸락눈이 나의 발등을 시리게 했다. 나는 지금 보도블럭에 내린 눈을 밟으며 아름답지 않았던 옛 추억을 떠올린다. 문풍지 파르르떨던 겨울 밤에 홋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떨던 어린시절이 차라리 아름답게 다가온다. 가난한 사람이 사는 동네에 내리는 눈은 전쟁터에 쏟아지는 연막 연기다. 가루눈이 언덕길을 지우던 밤에 연탄가스에 죽은 옆집 소녀 소식에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야 했다. 어느 해..

나의 창작시 2023.01.28

봄을 기다리며

봄을 기다리며 눈보라가 휘젓고 도망치는 숲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나무들이 서로를 껴안은채 말이 없다. 별빛이 차가운 언덕에 쏟아지고 달빛이 간간히 찾아와 말을 건네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가지 끝에 매단 암갈색 움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언 땅을 힘껏 뻗딛고 서 있다. 흰 눈이 정강이까지 차갑게 조여와도 이를 악물고 봄을 기다린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시로 겨울한파가 휘몰아치지만 숲의 나무보다 강한 의지로 얼마든지 고난을 이겨내곤한다. 영하의 차가운 공기가 푸른 생명을 모두 앗아간 겨울에도 봄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발을 꼼작거리며 봄을 기다린다. 제아무리 혹독한 동한(冬寒)이라도 봄은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2023.1.27

나의 창작시 2023.01.27

눈 꽃

눈꽃 어느 별이 부서진 조각들이 구름에 실려와 쏟아진다. 하늘에서 내려와서인지 지상의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소나무 가지에 꽃을 피우고 은행나무가지에도 하얀 꽃을 피운다. 쓸쓸한 까치둥지와 바람에 넘어진 갈대 숲에도 꽃을 피운다. 오로지 새하얀 꽃을 눈 닿는 곳마다 피워올린다. 지나간 시절 지천으로 피던 꽃이 가을바람에 스러진 후에 몹시 메말라 건조한 땅에 가슴이 먹먹하여 울고 싶더니 일시에 피어나는 포슬눈꽃에 내 마음도 눈송이와 함께 하늘을 난다. 마음이 어두운 모든 이들의 가슴까지 하얀 꽃밭으로 만들고 싶다. 2023.1.26

나의 창작시 2023.01.26

그 마을 이야기

그 마을 이야기 까칠봉이 까맣게 일어섰고 깃대봉은 하늘과 맞닿았다. 점점이 흩어진 우람한 산맥이 푸른 파도처럼 흘러내리고 미인송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는 국경 없는 새들이 모여 노래 불렀다. 꽃비 내리던 봄날 향기에 취하고 여름 장맛비는 그리움만 키우고 가을 단풍잎 곱게 염색할 때면 어린 소년은 숲길을 걸으며 꿈을 주웠다. 흰 눈이 처마까지 쌓일 때면 고립된 마을에는 산 노루가 가족이 되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을은 사라지지 않는 신기루였다.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 한 대에 마을 아낙네 늦은 밤까지 모여앉아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 울고 웃었고 황금심의 노랫가락에 혼이 빠졌다. 종교인보다 더 선한 이웃이 숟가락까지 챙겨주며 모여 살았고 양심법 하나만으로 충분한 그 마을은 나의 이상향이었다. 2023.1.26

나의 창작시 2023.01.26

맹추위

맹추위 눈구름 한 점 없는 맨 하늘에서 차가운 기운이 쏟아진다. 머리맡에 둔 물 양재기 꽁꽁 얼었던 그 해 겨울보다 더 춥다. 추위에 굼뜬 비둘기가 차에 치였고 지하 주차장에 피란 온 길고양이 눈치만 본다. 쪼그만 새들은 멀리 도망치고 마당 옆 목련 나무는 체념의 빛이 역력하다. 한파 주의보는 종일 전파를 타고 제주에 발이 묶인 승객이 가엽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수시로 불어 닥친 맹추위를 견디었다. 새벽 네시에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교를 건넜고 하루 연탄 한 장에 목숨을 맡기고 세 식구가 그 해 겨울을 보냈다. 아이앰에프 외환위기에 내 영혼을 장대에 매달았고 한여름 내내 등골에는 찬 서리가 내렸다. 곤파스가 수도권을 강타하던 밤 육십자 종탑에 기어올라 바람에 흩날리는 철판을 붙잡고 울었다. 영하 ..

나의 창작시 2023.01.24

재래시장

재래시장 돼지껍데기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원미동 재래시장에 간다. 쫄깃쫄깃한 껍데기 볶음은 소가죽처럼 질기지 않아 맛있다. 용산 굴다리 너머 재래시장에는 청과 채소가 산더미를 이루고 꼭두새벽 아르바이트를 뛰던 시절 단백질보충이 돼지껍데기였다. 한겨울 찬바람은 살갗을 파고들고 세차게 휘날리는 눈발은 작은 의지를 꺾곤 했다. 치열한 생존의 땀냄새는 겨드랑이 아래서 샘처럼 솟았지만 생존과 직결된 몇 푼의 지폐를 위해 그해 겨울 손수레를 끌어야 했다. 시장쓰레기 썩는 냄새가 점막을 자극하고 상스럽고 거친 욕지거리가 난무해도 손수레와 사람이 뒤엉킨 시장에는 인간다움의 정이 흘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시장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가까운 재래시장을 찾아가 그때 그 냄새를 다시 들이마시며 꿈을 키우던 초심을 되..

나의 창작시 2023.01.22

회한(悔恨)

회한(悔恨) 흘러간 시간을 어디서 찾으랴. 주어진 재물을 낭비함같이 붙잡지 못한 시간이 마냥아쉽다. 꽃이 피고 지던 날에 시간의 묘기에 관심이 없었고 밤과 낮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 정확한 시간이 작동되는 걸 잊었다. 내 젊은 날의 초상(肖像)은 별처럼 빛날 줄 알았고 총명했던 뇌의 기억 장치가 뇌진탕에 스러질 줄 몰랐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시간을 아끼라.’하던 시구(詩句)를 잊었던가. 밝던 태양은 햇무리에 갇히고 시간에 갉아 먹힌 하현달이 불쌍하다. 흘러간 시간의 자국마져 봄눈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되돌아갈 길은 찾을 수 없다. 두 개의 동공에 점안액을 집어넣어도 시간의 창문은 모두 닫혀있다. 섣달그믐에 나는 오뇌(懊惱)할 ..

나의 창작시 2023.01.21

설날

설날 신정(新正)은 해의 생일이고 구정(舊正)은 달의 생일일까. 서로 다른 두 항성의 출생을 누가 알랴만 신정은 신정대로 구정은 구정대로 좋다. 지구는 태양 위를 삼백육십오일 걸어가고 달은 지구 위를 삼백오십사일 걸어간다네. 지구는 낮길 이라서 빨리 걷고 달은 아마도 밤길을 걷느라 더딘 거겠지. 천고(千古)의 무궁한 시간을 언제까지 두 별은 걸을지 모르지만 두 광명을 하늘에 이고 사는 우리네야 설날을 두 번이나 맞으니 어찌 안 기쁘랴. 어느 해는 설국(雪國)에서 새 아침을 열고 때로는 혹한(酷寒)에 맞지만 두 설은 언제나 희망을 선물해서 좋다. 헝클어진 삶을 어제의 시간에 파묻고 새로운 결의로 첫날을 맞으니 좋다. 한 해가 또 복잡하게 뒤섞일지라도 설날은 모든 것이 새것이라서 마냥 기쁘다. 새 하늘, 새..

나의 창작시 2023.01.20

늙는 병

늙는 병 아파트모서리 격풍이 울고 겨울 가로수 몸서리친다. 세찬 눈보라에 지친 비둘기 겁먹은 눈동자 떨리는 가슴 섣달 혹한은 무자비하고 도시 전체가 한(寒)섬이다. 모락모락 오르는 굴뚝 연기 건넛마을 울리던 떡메질 소리 산촌을 깨우던 수탉울음 아스라한 기억도 소음에 묻힌다. 어쩌자고 자꾸만 역주행하여 옛날 풍경을 소환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늙는 병인터 그럴지라도 그리운 건 그리운 거지 2023.1.19

나의 창작시 2023.01.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