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 꽃 필 무렵 홍보랏빛 싸리 꽃이 억새풀 언덕에 곱게 피던 날 서글픈 가을빛은 굽은 산자락에 서리고 풀벌레 애련한 울음이 어느 여인의 흐느낌처럼 들린다. 뒤돌아보면 이런 분위기는 해마다 경험하는 감정이지만 주름 깊은 나그네 눈에는 슬픈 노래의 끝부분처럼 와 닿는다. 빈 풀 섶에 풀썩 주저앉아 흘려보낸 그리움들을 거둬들여 기억의 좌판에 진열하면 버릴 것 하나 없는 꽃잎으로 반짝인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때론 헤어졌던 아픔들까지 나를 나 되게 한 은혜이었고 싸리 꽃만큼이나 고운 이야기들이었다. 가을로 치닫는 산기슭의 정취는 삶의 이야기들을 무르익게 하고 싸리 꽃마저 모두 지고 나면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보게 되려나. 202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