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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392

싸리 꽃 필 무렵

싸리 꽃 필 무렵 홍보랏빛 싸리 꽃이 억새풀 언덕에 곱게 피던 날 서글픈 가을빛은 굽은 산자락에 서리고 풀벌레 애련한 울음이 어느 여인의 흐느낌처럼 들린다. 뒤돌아보면 이런 분위기는 해마다 경험하는 감정이지만 주름 깊은 나그네 눈에는 슬픈 노래의 끝부분처럼 와 닿는다. 빈 풀 섶에 풀썩 주저앉아 흘려보낸 그리움들을 거둬들여 기억의 좌판에 진열하면 버릴 것 하나 없는 꽃잎으로 반짝인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때론 헤어졌던 아픔들까지 나를 나 되게 한 은혜이었고 싸리 꽃만큼이나 고운 이야기들이었다. 가을로 치닫는 산기슭의 정취는 삶의 이야기들을 무르익게 하고 싸리 꽃마저 모두 지고 나면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보게 되려나. 2021.9.17

나의 창작시 2021.09.16

오늘 가을

오는 가을 하늘은 위로 뒷걸음질 치고 찬 이슬 풀잎에 시리다. 귀뚜라미 노랫소리 애연(哀然)하고 달빛 늦 메밀꽃에 차갑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가을 발자국소릴 내 살갗이 듣는다. 케플러 법칙의 공전 속도보다 비염 알레르기가 더 빨리 안다. 저녁 산 그림자 무겁고 지는 배롱나무 꽃 처연(悽然)하다. 뚝 끊긴 풀벌레 소리 적막하니 또 한 번 느끼는 그 분위기다. 봄은 언제나 설렘으로 다가 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무거울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쓸쓸함에 가슴 한 쪽이 크게 무너진다. 2021.9.11

나의 창작시 2021.09.11

아스라한 추억

아스라한 추억 운두령에는 종일 비가 내렸고 미제 스리쿼터는 연실 헉헉거렸다. 낮은 구름은 숲에 연막을 쳤고 바람은 연실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그 꼬불꼬불한 산길을 해질녘 짐칸에 실린 나는 흘러내리는 빗물을 쫄딱 맞으며 봉평 어디로 가고 있었다. 지붕도 없이 짐짝처럼 실려 엉덩이에 물집이 잡힐지라도 걸어서 그 령을 넘지 않아 좋았다. 비켜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었고 망태를 맨 심마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태우는 엔진 소리만 적막에 쌓인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우거진 숲에서 놀란 꿩들이 날고 일렬로 선 나무들만 일제히 여름비에 목욕을 감고 있었다. 내가 지나간 족적은 그 령에 없어도 내 기억 속에 그 길은 길게 누웠다.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이지만 살아보니 삶은 매일 버거운 령(嶺)이더라. 2021.9..

나의 창작시 2021.09.10

그곳 풍경

그곳 풍경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 나뭇잎 위로 노을 조각이 별처럼 쏟아지고 아직 땅거미가 내려앉기 직전 병풍같이 둘러선 산과 산 사이에는 장엄한 고요가 교향곡처럼 흘렀다. 붉은 수수가 알알이 여물어가고 여문 강낭콩 넝쿨은 장대를 타고 오르고 고개 숙인 벼이삭이 누레진 들판에는 적년신고한 보람이 자욱했다. 내가 몽정소년이 될 즈음에는 영혼이 햇순처럼 순해서 어린 눈 속에 비친 그곳 들판에는 밀레 만종의 종소리가 출렁거렸다. 억수장마를 이겨낸 풀잎들과 작렬하던 태양빛의 시련을 보랏빛 눈물을 쏟으면 피어난 나팔꽃들의 소리 없는 함성이 울려퍼지던 그곳 이맘때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2021.9.8

나의 창작시 2021.09.08

초가을

초가을 가을이 왔다고 하나 여름이 아직 나뭇잎 위에 앉아있다. 쏟아지는 한 낮 햇살은 파란포도를 새까맣게 태우고 가로공원에 붉게 핀 배롱나무 꽃은 지난달처럼 아직은 웃고 있다. 바짓가랑이를 적시던 아침 이슬과 가련하게 피어나는 메꽃을 아스팔트 까맣게 깔린 도시에서는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지만 하늘높이 고추잠자리 맴돌 때 가을이 밀물처럼 밀려옴을 감지한다. 울타리 휘감은 능소화는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며 뚝뚝 떨어지고 이웃집 마당가의 다알리아도 분홍 코스모스 기세에 풀이 죽는다. 조석으로 찬 기운 옷깃을 여미게 하니 맑은 이슬 점점 무거워지면 머잖아 나뭇잎들 붉은 한숨을 토하겠구나. 2021.9.5

나의 창작시 2021.09.05

삶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바다 위를 건너는 한 척의 배 방향 잃어 가련한 우리네 신세 창파에 떠도는 위험한 나그네 안전한 포구 어디던가 불쌍하구나. 광야를 걸어가는 고독한 인생 가도 가도 끝없는 메마른 땅 휘몰아치는 바람 흔들리는 몸 나 쉴 곳 어디던가 고달프구나. 태산준령 굽이굽이 지친 셰르파 양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등짐 거친 숨 몰아쉬는 힘겨운 걸음 백척간두 은산철벽 위태하구나. 어딜 가면 마음이 평안하더냐. 네가 찾는 행복은 어디 있더냐. 고뇌와 불안에 갇힌 삶의 고독은 숨 쉬는 동안 따라붙는 숙명이구나. 웃으며 피는 꽃에도 그늘이 있고 노래하는 새들도 때로는 운다. 삶에 열중하는 저 생명체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가여운 운명 2021.9.2

나의 창작시 2021.09.02

능소화의 기도

능소화의 기도 매일 같이 마을을 열어놓고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렸지만 기다린 당신은 오시지 않고 궂은비만 며칠 째 내립니다. 여름은 이렇게 쓸쓸히 가고 초가을 도시 공원까지 내려왔는데 오늘은 스산하게 바람이 불어 초조한 마음 길게 흔들립니다. 벽돌담장아래 작은 꿈을 묻고 몇 해를 살금살금 기어오르며 내 마음 줄기에 소중한 사랑을 그리움과 함께 매달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상심이 되면 안타깝고 불안한 맘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주저앉을지 모르니 지체 말고 달려와 날 잡아주세요. 2021.9.1

나의 창작시 2021.09.01

겨울 눈

겨울 눈 연일 대지를 불덩이로 만드는 삼복더위에 겨울눈을 생각한다. 새하얀 눈이 무질서하게 내려도 아무상관하지 않고 눈을 밟으며 걸으면 손발은 시려도 마음이 아늑해진다. 지저분한 것들을 부지런히 쓸어 덮고 삼림의 산새소리까지 잠재우면 오로지 눈이 점령한 산천은 건곤일색으로 단순한 세상이 된다. 흰 눈이 소리 없이 쌓일 때면 자기를 드러내는 색깔의 개성과 앞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의 경쟁과 온 종일 울어 제키는 곤충들의 공해도 없다. 함부로 피를 빠는 해충들의 아니꼬움과 불쾌지수에 뒤척이는 밤이 없다. 복잡하던 마음은 간단해지고 가라앉았던 기분은 풍선을 타고 오른다. 어미 품에 안긴 어린양처럼 온 세상이 내 품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흰 눈이 더욱 그립다. 2021.8.27

나의 창작시 2021.08.27

빗물

빗물 늦여름 비에 빗물이 고인다. 사방에서 흘러 온 빗물이 우묵한 곳에 가득 가득 고인다. 가득 고인 빗물은 다시 길을 찾아 떠난다. 그 빗물은 돌고 돌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배롱나무 붉은 꽃 하염없이 피어나고 울밑 봉숭아 흐드러지게 피던 날 어린 누나 손톱 꽃물들이던 까만 기억에 세월의 징검다리 끝에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왕잠자리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잎들 누릇누릇 가을을 알리던 날 나의 신분이 나그네인 걸 깨달았다. 오늘 내리는 빗소리는 틀림없이 또 한 계절을 데리고 멀리 떠나고 몇 밤만 자고난 빈 자리에는 가을이 나그네를 데리러 문밖에 서 있을 거다. 하늘가를 표락하던 늙은 나그네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많이 초조하다. 곧 낙엽 지는 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리는 빗물은 왜 그런지 자꾸만 가..

나의 창작시 2021.08.24

꽃밭에서

꽃밭에서 한 송이 꽃이 피기 위해 얼마나 많이 기다려야 했던가. 봄 서리에 새순 동상을 입던 날 산비둘기 서글피 울었고 들짐승 사정없이 지저 밟을 때 풀벌레도 가슴 졸였다. 돌개바람 휘몰아치던 날 운명을 하늘 끝에 매달아 두었고 그 고운 꽃망울이 가지마다 맺힐 때 새들은 합창을 하며 날았다. 아침 창문을 열고 꽃밭에 섰을 때 내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지나칠 정도로 풍겨나는 꽃향기는 나의 붉은 심장을 꽃밭에 묶어 두었다. 누구를 위해 그토록 아름답게 피며 무엇 때문에 술 빛 향을 토하는가. 정녕 사랑하는 그대 그리워 몹시 소중히 여기는 이 있어 그리했으리. 2021.8.23

나의 창작시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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