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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406

10월

10월 그해 불던 바람이 가끔 찾아온다. 마른 강 언덕에 섰을 때 사정없이 내 뿌리를 흔들던 젊은 날의 잔혹한 바람을 잊을 수 없다. 이 세상 그림자들을 몽땅 몰고 와 걸어가던 길을 캄캄하게 가로막았다. 10월의 태양이 빛났지만 사나운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길가 은행잎은 황금빛으로 엉켜있고 오렌지 코스모스는 꽃물결 파도치는데 무수히 쏟아지는 열매들은 내 주머니에서 아주 멀리 도망쳤다. 서있는 것들은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들만 피난처가 없다. 그래도 나는 황달 든 풀잎에 걸쳐 있는 실오라기 같은 햇살을 보았다. 공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으로 바뀌지만 끝까지 버티는 마지막 잎 새에 희망의 끈을 살며시 붙잡아 매두었다. 끈기 없는 잎들은 이미 뒹굴고 죽기를 결심한 잡초들은 길가에 스러졌다..

나의 창작시 2020.10.13

은행나무

은행나무 마을 수호신이 된 은행나무 한 그루 나이가 오래면 신령이 되더라. 아주 우연히 돌밭을 헤집고 두 잎이 솟을 때 누군들 기억했으랴 야생(野生)에서 버티어 온 긴긴 세월 허공을 찌르니 하늘이 도왔네라. 나이테마저 잊었을 무구한 광음(光陰) 관절(關節)이 썩어 깁스를 했어도 우거진 가지는 큰 담을 넘고 두꺼운 그늘에 새들 깃드니 단 한 그루 나무가 숲보다 더 숲일러라. 황금빛 은행잎 너붓거릴 때면 폭죽처럼 쏟아지는 그 깊은 황홀감에 어릿어릿 홀리어 가슴이 뛴다. 2020.10.12

나의 창작시 2020.10.12

가을 하늘

가을 하늘 공활한 하늘이 창연(蒼然)하다 구름까지 밀어내고 비움의 충만함이 넘실댄다. 참회한 마음보다 더 맑으니 신(神)이 거닐어도 부끄럽지 않겠다. 마음 구석에 눌어붙은 해결하지 못한 숙죄(宿罪)까지 가을 하늘에 깊이 헹구면 한 점 부끄럽지 않아 고개를 들겠다. 바람마저 숲에서 잠들고 태양은 가을빛 눈부시게 퍼부으니 때마침 활짝 핀 수레국화가 보기 드물게 청람(淸覽)하다. 발걸음 뜸한 호숫가에는 물새 몇 마리 한가롭기만 하고 호수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하늘은 내 영혼을 호수로 잡아당긴다. 2020.10.11

나의 창작시 2020.10.11

만목소연(滿目蕭然)

만목소연(滿目蕭然) 바람이 없어도 꽃은 지고 제아무리 붙잡아도 계절은 가네. 부르지 않은 가을이 산허리에서 단풍잎 차곡차곡 염색하네. 억새꽃 일렁이니 스산한데 기러기 울음 울며 어디로 가나 별빛도 차가운지 으스스 떨고 오동잎 힘없이 지니 가엾어라. 베고니아 골드베리 빛이 바래고 들국화 흩어져 고달픈데 피는 꽃 보다 지는 꽃 더 많으니 길 잃은 귀뚜라미 더욱 서럽다. 노옹의 허한 마음 누가 알랴 떠돌던 김삿갓이 부럽구나. 가을바람 옷깃을 파고드니 나도 모를 눈물이 가득 고인다. 2020.10.10

나의 창작시 2020.10.10

가을

가을 피었던 국화마저 지고 나면 이제는 피기를 기다릴 꽃이 없네. 화원에 피는 꽃이야 꽃이랄 수 있나 제 힘으로 핀 꽃이라야 꽃이지요. 피었다 금세 지는 꽃이라 해도 스스로 핀 꽃만을 꽃이라 부르려오. 찬이슬 맞으며 새하얗게 피어나는 음지뜨락의 곱디고운 국화에 여윈 두 뺨을 깨끗이 헹구어내고 빨갛게 달아오르는 단풍잎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익고 싶소. 한 해는 벌써 북향으로 기울고 눈꽃이 하얗게 들판으로 떨어지면 들볶기며 살아 온 한해도 여운(餘韻)만 남기고 사라질 테지요. 그래도 아직은 가을이니 잎잎이 곱게 물든 단풍을 즐기려오. 2020.10.9

나의 창작시 2020.10.09

어떤 노파(老婆)

어떤 노파(老婆) 구겨진 얼굴의 한 노파가 낡은 수레에 파지 몇 장을 얹었다. 고르지 못한 아스팔트의 작은 요철도 힘겹게 넘는다. 삶의 무게에 눌린 늙은 아낙은 살아온 이력이 얼굴에 얼룩졌고 얼핏 본 초점 잃은 눈동자엔 아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낡은 어깨는 툭 치면 부서지겠고 무거운 짐에 접힌 허리는 장정이 잡아당겨도 펴기 힘들겠다. 화려한 도시 그늘에 갇힌 극빈노인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잊는다. 천연스레 비치는 10월 햇살 따뜻한데 파지 줍는 노파의 차가운 가슴에는 한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듯하다. 노파 옆을 지나가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2020.10.8

나의 창작시 2020.10.08

오직 믿음

오직 믿음 처음부터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당신이 나에게 올 것이란 믿음 때문에 지금까지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심정으로 조릿조릿 마음을 졸였습니다. 십리 밖 어느 들길을 걸어오실까 재 너머 어느 마을에서 쉬고 있을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 헤메일까 별별 억측을 자아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세워서 묻고 혹여 당신일까 또 확인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물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생각을 바꿔 당신 오시는 그곳을 찾아 나섭니다. 날은 저물어 초승달 산마루에 남실대고 찬바람 옷깃을 연실 파고드는데 어딜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으려나 방황하는 내 마음 당신은 아실까. 아직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안고 칠흑 같은 어둠이 술렁거린다 해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창작시 2020.10.07

어떤 기도(祈禱)

어떤 기도(祈禱) 여러 번 시도했지만 간격이 깊었다. 짧은 거리인 줄 알았는데 별과별의 거리만큼 느껴졌다. 성대를 부풀려 소리 질렀지만 메아리일 뿐 그대 귓전에 도달하기 전에 흩어졌다. 이젠 도리 없으니 포기하라는 자아의 비판이 확성기 음향처럼 귓가에 울려도 나는 여전히 그대 창가로 달려간다. 반구(斑鳩)의 애닮은 울음소리가 심장을 파고들 때 내 마음이 전달 될 실마리가 보였다. 그대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린 암양의 눈빛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어미 곰만큼 외쳐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대여 이제는 닫은 창문을 열고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눈길을 주시오. 아니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불빛만큼의 희망이라도 주시오. 내 가슴 속 깊이 간직한 굳은 믿음이 낡아빠진 이념이 아니란 걸 보여주시오...

나의 창작시 2020.10.06

죄수

죄수 포성은 멎지 않고 땅을 흔들었다. 막달 찬 여인의 뱃속에서 아기가 울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측했는지 하늘을 보고 싶어 했다. 해맑은 웃음의 소녀는 궁전에서 살았다. 나는 그즈음 벽촌의 죄수였다. 캄캄한 동굴에 갇혀 스스로 탈출할 힘을 키우고 있었다. 도망칠 때 마다 아버지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 오랜 후에 나는 그녀가 사는 도시로 왔다. 나는 그녀와 동갑이나 붕배(朋輩)는 아니다. 늘 그녀의 도학적 삶을 부러워했다. 그녀는 사다리를 딛고 산꼭대기에 섰다. 바람이 산을 흔들 때 붉은 하늘이 무너졌다. 나는 하나도 울지 않았다. 내가 선 땅에는 하늘로 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그는 검은 차에 실려 가면서 울지 않았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내뱉고 싶은 말들..

나의 창작시 2020.10.06

메밀 꽃

메밀 꽃 비련으로 끝난 슬픔이 시월 달빛에 섞여 강물처럼 흐르고 귀뚜라미마저 사라진 들녘에는 애절한 그리움의 노래가 바람결에 나부낀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한 맺힌 넋이 돌아갈 곳마저 찾지 못해 방황하다 아득한 메밀밭 언저리에 쓰러져 밤새도록 하얀 울음을 토한다. 연실 밀려오는 파도보다 더 하얀 슬픔이 달빛에 어리비치고 배태 한 번 못해본 청상과부의 흐느낌처럼 굽이굽이 서린 창자를 쥐 뜯는 고통이 차가운 메밀 꽃밭에서 들린다. 2020.10.5

나의 창작시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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