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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406

어느 역에서

어느 역에서 내가 머물던 곳은 모두 역(驛)이다. 봄날 머물 던 역에는 진달래가 곱게 피었지만 여름에 머물 던 역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잊을 수 없는 역은 겨울역이었다. 앙상한 플라다나스는 길가에서 떨었고 코트 깃을 세워도 바람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얀 눈이 지운 철길에는 기다리던 열차가 오지 않았고 밤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침(時針)은 가슴에 고인 불안을 작두우물처럼 퍼 올렸다. 어디론가 가야야 할 소녀는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성애 꽃 핀 유리창에 하얀 입김을 불었다. 내가 갈 곳은 귀향(歸鄕)이 아니라 반겨 줄 사람 없는 미지의 역이다. 거기서 다른 열차를 갈아타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곧 도착할 열차는 나를 싣고 떠나겠지만 새 세상을 찾아 나선 나는 항상 외로운 나그네일 뿐..

나의 창작시 2020.10.24

기도(祈禱)의 힘

기도(祈禱)의 힘 칡뿌리를 파서 방망이질을 하던 옆집 아이는 황달이 들어 쓰러졌고 교실 앞자리에 앉아 셈본을 하던 여자 아이는 폐병에 걸려 피를 토했다. 태양은 매일 대산(大山)차고 떠오르지만 배고픈 하루는 길기만 했다. 강냉이 죽 배급을 받은 아이들은 흘러내린 코를 죽에 섞어 삼켰고 책보에 둘둘 말은 도시락 김칫국물은 등골을 타고 내려 엉덩이 사이가 짓물렀다. 어느 날 찔레를 꺾어 주린 배를 채우던 나는 강기슭에 앉아 목 놓아 울었다. 뚫어진 양말마저 꿰맬 천이 없어 검정 고무신 한 켤레에 맨발을 담그고 칼바람이 부는 언덕길을 걷느라 시오리 학교 길에 발이 얼었다. 웃음을 잃은 아이들은 감정도 메말랐고 서로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난이 무겁게 짓누른 동심(童心)마다 꿈과 희망마저 멀리 도..

나의 창작시 2020.10.23

이 길

이 길 하나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또 다른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다 보니 다시 길을 만난다. 내가 달려 온 길이 빠를 줄 알았는데 더 빠른 길이 있고 이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안개가 길을 지우고 낙엽이 길을 덮지만 왕래가 빈번한 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보이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은 오래도록 감춰진 길이며 그 길은 워낙 좁아 찾는 사람이 적다. 이 길을 처음 걸어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의 발자국은 사라졌어도 그의 정취는 길 위를 맴돈다. 얼마나 더 걸어야 이 길의 끝에 설지 그 끝에는 과연 누가 있을지 궁금하다. 오늘은 가을 낙엽이 발 앞에 쌓인다. 지친 두 다리는 크게 흔들려도 멈출 수 없는 나는 가파른 길을 오른다.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지만 뒤를 돌아다보지 않기로 했다. 나는 결국 길..

나의 창작시 2020.10.22

소나무

소나무 내가 첫 울음을 터트린 솔밭에는 청솔가지들이 곤두섰고 나는 솔숲에 서서 소나무가 되기로 했다. 송화 가루 쏟아지던 어느 봄날 전두엽까지 치미는 냄새에 취해 푸른 소원을 소나무 정수리에 걸었다. 적송 즐비한 갓 바위 터를 걷던 날 솔잎 향기에 세례를 받았고 억척같이 뻗어나간 목근(木根)에서 내 인생의 뿌리를 자세히 측량했다. 겨울바람이 사납게 덤벼들어도 칼 한 자루 없이 맨몸으로 싸웠고 갑옷을 겹겹이 입고 스스로 요새가 되었다. 수억의 바늘을 양손에 들고 매일 내 몸을 찌르며 단련했고 동심원의 어지러운 나이테가 내 인생의 값진 보물이 되었다. 아직도 내 꿈은 높은 산위를 바라본다. 한 그루 낙락장송이 되어 백로가 집을 짓는 그 날을 꿈꾼다. 2020.10.21

나의 창작시 2020.10.21

저무는 가을

저무는 가을 미루나무를 타넘은 햇살은 어느덧 계양산성 고개를 넘어간다. 앞산 그림자 뒷산 봉우리를 기어오르고 서늘한 바람은 오동나무 잎을 떨군다. 황달 든 산은 하루가 다르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국화만 나를 홀렸던 소녀의 피부 빛 같다. 말없이 흘러가는 저 강물은 애끓는 그리움에 강둑까지 차오르고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은 강변에 나부끼는 갈대숲으로 쏟아진다. 내가 부르던 그리운 이름은 아스라한 기억 속에서 헤매고 수줍음 타던 소녀의 고운 미소만 저녁노을에 길게 걸려있다. 저무는 가을 들녘이 퍽 허허롭지만 곱게 익은 나뭇잎에서 행복을 줍는다. 2020.10.20

나의 창작시 2020.10.20

들국화

들국화 서늘한 가을 구름 아래 물감처럼 번져가는 내 어머니 얼굴 같은 꽃이여 언제나 바람 부는 들녘에서 야생의 생명력으로 억세게 견디며 어느 누구도 돌봐주지 않아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하늘 빛 닮은 꽃이여! 들짐승 발굽에 짓밟히고 고약한 새부리에 때로는 쪼여도 상처 입은 가슴 속으로 앓으며 흔들릴 지언 즉 꺾이지 않는 꽃이여! 한 뼘 두 뼘 영역을 넓혀 잡초 무성한 들녘을 꽃밭으로 가꿔 향기 만발한 들국화여! 그 이름 가을 들판의 왕 쑥부쟁이! 오후 햇살에 유난히 빛난다. 2020.10.19

나의 창작시 2020.10.19

이름

이름 존재하는 실재는 모두 이름이 있네. 다만 이름을 모를 뿐이네. 나무 풀 꽃 산 그리고 사람까지 격에 맞는 이름이 있네. 처음부터 이름이 존재한 건 아니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었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냥 어떤 꼴일 뿐이었네. 이름이 있어 그를 기억하고 이름으로 인하여 세상이 아름답네. 꽃과 나무에 이름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별이라 불러줄 때 별이 되었고 꽃이라 불러주니 꽃이 되었네. 이름을 붙여주니 비로소 동물이 되고 사람이 되었네. 저기 가는 저 사람도 이름이 있네. 누군가는 그 이름을 잊지 못해 한없이 그리워할지도 모르네. 나 또한 이름이 있어 오늘 내가 있네. 사람들이 불러 줄 이름말이네. 2020.10.18

나의 창작시 2020.10.18

단 하루의 일탈(逸脫)

단 하루의 일탈(逸脫) 직함과 신분의 옷을 벗어놓고 홀로 령(嶺)을 넘는 차륜도 가볍다 가을이 점령한 심심(深深)산골의 어느 냇물에 발을 담그니 새 세상이다. 여기는 불가분적 관계나 모순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업무도 사라졌고 체면과 격식도 필요 없다. 오직 무한한 자유만 흐를 뿐이다. 풀밭에 누우니 야생 형향에 취하고 새처럼 마음은 공중에 떠 있다. 계곡 꽃단풍 선혈처럼 붉어 헝클어진 마음에 뜨거운 불을 붙인다. 인간도 원래 숲과 하나 되어 구름처럼 흐르고 바람 되어 불다가 강물 따라 정처 없이 흘러 안개 되어 사라져야 행복하리라. 낮선 이방 땅에 일상의 노예가 되어 벗을 수 없는 멍에를 스스로 메고 개금발로 뛰어 외나무다리를 건너온 고삐에 붙잡힌 세월이 무거웠다. 마음이 지시한..

나의 창작시 2020.10.15

잊힌 풍경

잊힌 풍경 시골 굴뚝이 사라졌다. 한 방울의 연기도 오르지 않는다. 밥 익는 냄새는 전기밥솥이 훔쳐갔고 피어오르던 모깃불 풍경은 대한 늬우스에서 얼핏 보았다. 누워서 새김질 하던 새끼 딸린 암소 땋은 머리 소녀가 짚수세미로 그릇을 닦던 흙냄새 그윽한 집터에는 들국화만 핀다. 어머니 발자국에 닳던 부엌 문지방 군불 지피던 낡은 불집게 강아지 밥 주던 나무 두가리 시커멓게 그은 쌍심지 남포등도 기억의 공간에서 녹슬었다. 검은 아스팔트 신작로를 지우고 소달구지 타고 오일장 가던 굽잇길 시원한 고속도로 차들이 맹렬하다. 아파트 숲에 깊이 갇힌 채 무기수로 징역생활을 하지만 저녁별이 삼십층 모서리에서 깜빡일 때면 잊힌 풍경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어머니 잦은 기침소리가 들린다. 2020.10.14

나의 창작시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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