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에서 내가 머물던 곳은 모두 역(驛)이다. 봄날 머물 던 역에는 진달래가 곱게 피었지만 여름에 머물 던 역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잊을 수 없는 역은 겨울역이었다. 앙상한 플라다나스는 길가에서 떨었고 코트 깃을 세워도 바람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얀 눈이 지운 철길에는 기다리던 열차가 오지 않았고 밤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침(時針)은 가슴에 고인 불안을 작두우물처럼 퍼 올렸다. 어디론가 가야야 할 소녀는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성애 꽃 핀 유리창에 하얀 입김을 불었다. 내가 갈 곳은 귀향(歸鄕)이 아니라 반겨 줄 사람 없는 미지의 역이다. 거기서 다른 열차를 갈아타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곧 도착할 열차는 나를 싣고 떠나겠지만 새 세상을 찾아 나선 나는 항상 외로운 나그네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