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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407

천지(天池)

천지(天池) 그 옛날 화염이 못을 팠다. 신비에 이르는 길을 산이 가로막고 검은 안개는 햇빛까지 가두어버렸다. 영봉(靈峯)에 이르는 발길은 거칠었지만 내뿜는 야생화 향기를 따라 비포장 길 돌고 또 돌아 천지로 갔다. 승천 못한 하늘이 벽속에 갇힌 채 억겁 세월 겹겹이 쌓인 눈물이 절벽을 뛰어내려 압록과 두만이 된다. 바람은 구름을 연실 몰아내고 절벽은 파수꾼이 되어 못을 지킨다. 접근이 불허된 천지(天池)는 신령만큼 거룩하고 천상처럼 오묘하다. 바라만 볼 뿐 밟을 수 없어 숭상할 만큼 경외감만 서린다. 조금 전 바람이 호수에 빠졌더니 뭉게구름이 뛰어내렸다. 구름이 탈출하자마다 호수에 태양이 빛난다. 순간순간 바뀌는 거대한 화면은 특별한 세상을 생중계하고 있다. 북에서 건너온 새 몇 마리 내 곁을 지나며 ..

나의 창작시 2020.05.23

작약 꽃

작약 꽃 겨우 며칠 화려했다. 쌈을 먹다 목구멍에 걸려 관자놀이에 드러난 핏대보다 더 붉던 작약 꽃이 저항도 없이 무너졌다.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촛대처럼 솟구치며 꽃망울 발롱대며 햇볕과 장난할 때 양귀비보다 더 화려할 뒤태를 보았다. 초여름 햇살이 꽃잎에 섞여 백 번을 칠한 정물화보다 더 붉을 때 나는 네 곁에서 삶의 희망을 캤다. 너무 고와 벌 나비도 두려워 얼씬 않던 황실(皇室) 뒤뜰만 거니는 황녀 같은 자존심도 가랑비 두어 번 맞고 난 후 어미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장롱 앞판의 무늬처럼 화려해도 열흘을 채우지 못하는 가련함 앞에 모란이 질 때처럼 두견은 울었다. 제아무리 무리지어 홍역처럼 물들어도 아침별처럼 일제히 사라진다. 꽃은 지고 푸른 잎사귀만 허무하게 푸른 하늘 아래서 쓸쓸하게..

나의 창작시 2020.05.22

녹슨 추억

녹슨 추억 비가 내리는 날에는 기분이 약간씩 날개 짓을 한다. 빗소리가 좋아 창문을 열고 빗금 치며 내리는 비를 보노라면 파랗게 녹슨 추억이 비를 맞으며 나무 위를 걸어온다. 어느 언덕 외진 카페에서 진한 원두커피를 우리는 함께 마셨었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그 가수의 낭만을 위하여가 우리 두 사람의 가슴을 알 수 없는 끈으로 묶어주었다. 비는 마로니에 나뭇잎을 타고 내려 고인 웅덩이에 그리운 얼굴을 그려놓고 물길 따라 긴 꼬리를 남길 때 잃어버렸던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내린다. 흐린 허공에 그리운 사람 얼굴이 설핏설핏 눈앞을 지나간다. 2020.5.20

나의 창작시 2020.05.20

춘궁기(春窮期)

춘궁기(春窮期) 보랏빛 꽃을 피우는 자주색감자가 비름나물과 키 경쟁을 하고 있을 때 배고픈 동심은 톱밥보다 더 억샌 옥수수밥을 눈물에 말아 억지로 삼킬 때면 마당가 미루나무 잎에 앉은 햇볕이 팔랑거리며 나를 달랬었다. 아버지의 힘은 과녁을 빗나갔고 어머니의 노력은 레일을 벗어난 기차였다. 자식들이 배를 곯아도 그건 부모의 탓이 아니었다. 오랑캐가 쳐들어온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 때 동심(動心)은 찔레꽃을 따 먹다가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단물을 빨다가 이름 모를 풀잎을 뜯어먹는 염소새끼였다. 초점 잃은 눈에는 대낮에도 별이 보였고 산고랑에 흐르는 물소리를 배꼽에서 들으며 잠을 청하지만 하루도 여러 차례 적응장애에 시달렸다. 어머니 뜨거운 눈물이 내 양 볼을 적시면 불쌍한 내 새끼 소리가 자장가가 된..

나의 창작시 2020.05.19

무서운 적

무서운 적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조명탄이 두려운 밤을 밝힌 적이 없다. 철모를 쓴 군인들의 작전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이 뚫렸다며 아나운서가 말을 더듬었다. 사람마다 가면으로 낯빛이 하얘졌다. 숨이 가빠져 호흡이 턱까지 차올랐다. 지루한 전쟁은 4개월째 진행 중이다. 워낙 게릴라전에 능한 적병들은 끈질기다. 날아드는 최신식 무형 탄환은 달라붙어서 파고들어가 생명을 끊는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눈이 두 개밖에 없는 인간들은 불안하다. 옆 집 사람 둘이 총에 맞았는데 비닐포장을 한 사람들이 음압으로 데려갔다. 지친 사람들이 배짱이 생겼다. 밀폐지에서 춤을 추다 160명이 총에 맞았다. 사람들마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도 통하지 않고 전문의사도 꽁지를 뽑아버렸다...

나의 창작시 2020.05.18

오느 날 오후

어느 날 오후 바람기 없는 초여름의 오후 아카시아 향기가 안방까지 밀려든다. 반쯤 흐린 하늘은 햇살도 반쯤이고 바람은 생각나면 가끔 나뭇잎을 흔든다. 음성 좋은 MC가 진행하는 익숙한 클라식 곡이 전파를 탄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장엄하다가 고요하다가 바이올린, 첼로의 앙상블이 감미롭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낭만주의 작곡가 브람스의 서곡... 하나같이 오늘 분위기에 어울린다. 저 곡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고뇌가 컸을까. 몇 밤을 잠 못 이루며 악보를 그렸을까. 오선지는 몇 장을 찢었을까. 마누라 등쌀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곡을 듣는 나는 행복한데 그들은 행복했을까. 아마도 나처럼 저들도 고뇌했을 거다. 오래 전에 그들은 먼 곳으로 떠나갔어도 두고 떠난 곡은 날개를 달고 ..

나의 창작시 2020.05.17

비에 대한 소묘

비에 대한 소묘 시인/박인걸 구름이 흘리고 간 눈물이 표적 없이 지상으로 곤두박질한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처럼 떨어진 자리가 운명을 결정짓는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빗방울은 산산이 부서진다. 나뭇잎 위로 떨어진 비는 잎이 되겠지, 쏜살같이 달리는 차에 부딪쳐 자살할 때 쏟아진 피는 흙탕물이 된다. 운 좋은 빗방울은 강물위로 쏟아져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미 품을 찾아간다. 숲으로 내린 빗방울은 나무뿌리에 걸려 바다로 갈 꿈을 접고 산에서 산다. 꽃밭에 내려앉은 빗물은 며칠 후에 고운 꽃으로 변신하리라. 하늘과 땅 사이를 맴도는 나는 빗물처럼 떠돌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지금은 이 땅에 갇혀 몸부림치지만 구름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날 우주의 영원한 자유인이 되리라. 2020.5.16

나의 창작시 2020.05.16

이팝나무 꽃

이팝나무 꽃 시인/박인걸 이팝나무 꽃잎이 눈처럼 쌓였다. 어떤 사람이 꽃잎을 보며 쌀밥 같다고 한다. 그 시절 명절에야 겨우 이밥 먹던 기억에 내 가슴이 먹먹하며 감정이 굴절된다. 장마 비처럼 쏟아진 가난에 굶은 아이들 얼굴마다 찔레꽃 버짐이 번지던 유독 눈이 퀭한 소녀 얼굴이 떠오른다. 배고픔에 지친 소년이 먼지 뽀얀 신작로를 휘청거리며 걸을 때면 길가에 핀 노란 꽃들이 과자로 다가왔다. 찔레 순 꺾어 먹으며 친하게 어울리던 애들은 쌀밥을 실컷 먹으며 지금은 뭘 생각할까. 저토록 고운 꽃송이를 보며 아직도 나는 어두운 과거를 꽃잎처럼 털어버리지 못할까. 영혼에 달라붙은 뼈아픈 기억은 눈에 박힌 아름다운 추억을 추월하나보다. 조금 전에 뛰어나온 아침 햇살이 새하얀 꽃송이에 황금 가루를 뿌린다. 순간 꽃잎..

나의 창작시 2020.05.15

점봉산

점봉산 왜 점봉 산인지 모른다. 그 산이 꼭 야생화 천국만은 아니다. 구름이 그 산을 넘을 때마다 부서졌고 떨어진 조각들이 아랫마을로 흩어질 때면 마을에는 비가 눈물처럼 내렸다. 가시철망이 촘촘한 산 아랫마을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아이들이 군가를 불렀고 사람들은 철조망에 갇힌 나를 군바리라고 불렀다. 얼차려에 혼이 빠져 점봉산 메아리가 되고 자갈 밭길을 무릎으로 길 때면 햇살도 사라졌다. 눈을 뜨면 언제나 가파른 산이 서 있고 계절마다 다른 색깔이 눈동자를 염색했다. 거기는 늘 바람이 울며 지나갔다. 잡초가 뒤덮인 황무지에는 갈대가 울었다. 불규칙한 골짜기에는 안개도 어지러웠고 붉게 타던 가을 산만 내 가슴을 끌어당겼다. M16 소총소리는 산과 산 사이에서 콩을 볶았고 놀러왔던 산 까치들이 깊은 숲으로 ..

나의 창작시 2020.05.14

철쭉 꽃

철쭉 꽃 불이 타네 불이 타 산허리 휘감고 타오르네. 바람 한 점 없는 저 언덕에 연기도 없이 불이 타네. 냇가에도 불이 타네. 시뻘건 불이 크게 번지네. 바직거리는 소리도 없이 낮밤 없이 불이 타네. 님이 그리워 속이 타나 그리운 님 떠나 속이 타나 속울음을 쏟아내며 애간장이 녹아내리네. 태워라 태워 까맣게 태워 먼 산 앞 산 다 태워라. 기왕에 태울 바에야 이 내 가슴도 붉게 태워라. 2020.5.13

나의 창작시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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