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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시 1407

나그네

나그네 나는 아직도 나그네이다. 뒤돌아보면 까마득한 길을 표락하며 낯선 이방 땅에서 서성이었다. 산천을 벗 삼아 유랑하지 못했다. 봇 짐 지고 남도(南島)를 떠돌지도 못했다. 협간에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갔다가 폭포수 노래하는 절경을 걷다가 새들이 속삭이는 숲속에 누웠다가 어느 주막에서 꿀물을 마시지 못했다. 줄자로 재면 뼘으로 잴 거리에서 커다란 쳇바퀴를 타고 여태껏 돌았다. 어느 가을 밤 풀벌레 소리가 나그네의 객수(客愁)를 불러일으킬 때면 길 잃은 나그네는 동공이 여러 번 풀렸고 어느 여름 햇볕이 정수리에 꽂힐 때 모래밭에 드러누워 담즙을 토했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 섰을 때 성난 파도는 나그네의 슬픈 노래를 빼앗았다. 외로운 싸락눈이 발등을 묻을 때 바람막이 없는 벌판길을 걸었고 정거장 하나 없는..

나의 창작시 2020.05.02

5월 아리아

5월 아리아 5월은 또 다시 문을 열었다. 희망은 언제나 가슴에서 출발한다. 세상은 일제히 푸른 물결을 이루고 지난달에 못다 핀 꽃들이 연이어 핀다. 잔인한 4월은 넉넉하지 않아 샛바람 된 바람이 연일 가슴을 흔들고 비 없는 구름은 지루했었다. 싫어하는 자들과 번번이 마주치고 괴롭히던 앙숙과 한 차를 타듯 잔인한 우한 온역(瘟疫)에 고달팠었다. 삭연히 목련이 지던 날 울컥 눈물이 솟고 난분분한 낙화에 가슴 저렸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흉측한 가면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고 걸어 잠갔던 마음도 열어 제키고 너와 나 사이에 거리낌 하나 없는 땅김이 체온처럼 느껴지는 세상이고 싶다. 오월 정원(庭園) 숲에는 요정들이 거닐고 드넓은 들판은 초록파도가 춤춘다. 4월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진한..

나의 창작시 2020.05.02

고향의 서정(敍情)

고향의 서정(敍情) 바람 섞인 햇살이 산을 넘으면 송홧가루 안개처럼 날아 내리고 조팝나무 무리지어 길가에 피면 이름 모를 새들은 짝을 찾았다. 앞산 신록(新綠)은 눈이 부시고 뒷산 꽃송이 숲을 집어삼켰다. 냇물은 나긋나긋 밤새 흐르고 봄 하늘엔 별빛이 형형했었다. 징검다리 건너던 꽃 댕기 소녀 분홍 꽃 달라붙은 하얀 코고무신 살랑살랑 춤추는 포플린 치마 소년의 여린 가슴 붙죄어 놨다. 송사리 떼 짝 찾아 물살 헤치고 흰나비 노랑나비 짝 찾아 날고 버들피리 소년은 냇가에 앉아 곡조 없는 노래를 멀리 보냈다. 하루해가 저무는 마을 뜰에는 저녁 빛 으스름히 길을 지우고 북두칠성 어김없이 하늘에 걸리면 올빼미 어디선가 나를 불렀다. 2020.5.1

나의 창작시 2020.05.01

4월 언덕에서

4월 언덕에서 출혈하는 철쭉 가로공원을 물들이고 젊음의 함성 같은 잎들이 도시 가로(街路)에 펄럭인다. 세상은 늘 소란해도 꽃은 피고 산은 푸르다. 매연 낀 도시 하늘에도 꿈을 가진 새들이 높이 난다. 우한에서 온 불청객에 온 세상 사람들이 창백해도 어느 뜨락의 모란은 야살스럽고 되바라지다. 4월의 그 잔인한 기억들도 핏빛 꽃들이 지워버렸다. 으름넝쿨 보랏빛 꽃송이에서 향기 짙은 세상을 본다. 2020.4.30

나의 창작시 2020.04.30

연읍(戀泣)

연읍(戀泣) 바람은 불고 꽃잎도 지고 날은 저물고 새들은 노래를 멈췄다. 가로등 하나 둘 불을 밝히면 너에 대한 그리움에 경련이 인다. 떠나 온 세월이 너무 아련해 서글픔도 가라앉고 한스러움도 삭아 두 팔로 휘저어도 눌어붙었다. 억압된 충동이 불 일 듯하면 마음은 급하게 들길을 달리고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는 네 모습에 넋 나간 꼴로 그 자리에 서있다. 이런 연읍(戀泣)이 오늘만은 아니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서 붉은 노을 물들던 날 강둑에서 낙엽이 뒹굴던 날 벤치에서 짝 잃은 어느 사슴처럼 울었다. 오늘도 네가 그리워 운다. 2020.429

나의 창작시 2020.04.29

어떤 두려움

어떤 두려움 해는 그 길로 걸어 방금 산을 넘었다. 밀려온 어두움이 골목을 덮으면 가던 바람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병정처럼 늘어선 전봇대가 불을 밝히면 사람들은 제각기 바쁘게 돌아가고 어둑한 주차장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건너편 아파트에 불이 켜지고 꽃 잎 떨어진 마을 공원에도 인적이 끊겼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칠 때 그때의 두려움이 숨겨둔 뇌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언제나 이런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만성 조울증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나의 낡은 구둣발은 연신내 둑을 걸었고 안주머니에는 지폐한 장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봉천동 가는 버스는 두 번 갈아타야 했는데 고작 구멍 난 토큰 하나가 날 쳐다봤다. 나름대로의 포부(抱負)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근근이 고학으로 학문을 습득하던 때 허기진 창자..

나의 창작시 2020.04.28

어떤 노인

어떤 노인 거울 안에는 한 노인이 서 있다. 정수리까지 흰서리 내리니 무정세월이 원망스럽다. 첫돌사진은 잃어버렸더라도 기억 속에 얼굴은 꾸밈없는 꽃이었다. 비 온 뒤 태양이 구름을 찢을 때 소년은 무지개 위를 걸었다. 하얀 눈이 푸른 강물에 쏟아지던 날 그녀와 나는 한 배를 탔다. 스러지는 갈대밭을 지나 금광(金鑛)지대를 달려가며 우리 둘은 생손톱이 빠지도록 흙을 팠다. 그 자리에 황금(黃金)은 없었고 발길에 돌멩이만 허무하게 차였다. 내가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론은 나를 위한 책이 아니었다. 그럴 듯하게 그렸던 자화상을 갈기갈기 찢어 시궁창에 처박았다. 고락이 뒤섞이고 희비가 갈마드는 굴곡(屈曲)진 인생의 바둑판을 알듯하니 사람들이 나를 노인(老人)이라 부른다. 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세..

나의 창작시 2020.04.27

아침 안개

아침 안개 우리 마을에는 이따금 안개가 내린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도시를 지운다. 쓸어 담으면 한 컵도 안 되는 액체가 마술하듯 동네를 미궁(迷宮)으로 밀어 넣는다. 안개는 자동차 매연과 하나가 되고 아파드나 빌라 가스 연기와 손을 잡는다. 중앙난방시설 굴뚝의 흐릿한 기체가 안개 속으로 뛰어 들면 받아준다. 추운 날 아침 하얀 입김을 자기편으로 만든다. 안개 앞에는 화려한 불꽃도 사라진다. 안개는 비싼 차와 싼 차의 라벨을 지우고 윈도우에 진열된 고급 진열품을 지운다. 도로변에 매달린 간판을 지우고 자동차 엔진 소리를 없앤다. 안개는 가슴 깊이 파고들어 조급함을 지우고 나의 발자국 속도를 느리게 끌어당긴다. 안개는 아침을 하얀 밤이 되게 한다. 나는 안개를 매우 좋아한다. 안개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나의 창작시 2020.04.25

어느 봄날에

어느 봄날에 겨우내 침묵 속에 키워 낸 꿈이 마침내 엷은 막을 재치고 튀어나와 동시 다발로 옮겨 붙어 눈길 닿는 곳마다 파랗게 불태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잿빛 세상은 여윈 모습으로 초라했다. 바람이 돌아치며 할퀸 상처들이 찢어진 보자기처럼 너풀거렸다. 엊그제 퍼부은 봄비 탓에 밤잠을 자고 나올 때마다 짙푸르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새파란 소망을 하늘로 쏘아 올린다. 나는 지난 겨우 내내 울었다. 빈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가슴은 콩알만큼 졸아들고 푸른 꿈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제야 나는 긴 숨을 들이쉰다. 내가 품었던 꿈이 허황된 줄 알았는데 새파란 세상을 만들고 있다. 푸른 세상이 좍 펼쳐질 때 꿈인가 싶다. 2020.4.24

나의 창작시 2020.04.24

일몰(日沒)

일몰(日沒) 信士/박인걸 저기서 저기까지 걸어가느라 태양은 온종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걷는 길은 출구 없는 고독이다. 진종일 대지에 쏟아 부은 햇살은 코로나 긴급구제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다에 빠진 잉여햇살은 곯아떨어진다 해도 흘리고 간 햇살은 어떤 가슴을 어루만졌으리라. 일몰 이후의 거리는 그림자들이 도망치고 각을 세우고 일어섰던 세상은 어둠속으로 침몰한다. 그 시끄럽던 굉음도 일제히 무너져 버리고 그토록 견고하던 도시는 담덩어리에 불과하다. 다만 전광(電光) 아래 몰려든 불나비들만 희미한 불빛에 희망을 건다. 나에겐 일몰(日沒)이 설레임이다. 온 종일 따라 다니던 바람을 쫓아버렸고 귓전을 울리던 발자국 소리를 신발장 안에 가뒀다. 계단을 오르느라 갉힌 연골에 기름을 치고 전두엽에서 빠져나간..

나의 창작시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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