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횡단보도에서

신사/박인걸 2022. 9. 24. 06:31
  • 횡단보도에서
  •  
  • 구름 몇 점 떠 있는 하늘 아래
  • 그토록 아름답던 능소화는 모두 졌다.
  • 아무도 심지 않은 나팔꽃이 전봇대 타고 오르다
  • 제풀에 꺾여 스러지고
  • 희끄무레한 낯선 꽃만 희미한 미소로
  • 지나가는 길손을 쳐다본다.
  • 스러져가는 계절에는
  • 안타까운 사연이 사방에서 널려있다.
  • 허리 꼬부라진 노인은 신호등 앞에 서
  • 자신의 허리를 휘게한 시간을 쳐다보고
  • 파지 줍는 할머니는 자신의 무게를
  • 손수레에 싣고 힘겹게 끌려간다.
  • 약봉지를 손에 들고 지팡이를 짚은
  • 엷은 우수에 잠긴 노객(老客)이 가엽다.
  • 시간에 쫓긴 귀뚜라미는
  • 대낮인데도 건물 귀퉁이에서 운다.
  • 이제는 태양 빛도 짙은 그늘에 쫓겨
  • 아파트 지붕위에 모여앉았고
  • 뇌력을 잃은 기계들만 붕붕 대며
  • 미친 짐승처럼 도시를 활보한다.
  • 경계석에 발을 얹고 잠시 바라본 가을은
  • 기침 소리와 앓는 소리로 서글프고
  • 담배 연기보다 더 자욱한 한숨 소리가
  • 병든 가로수에서 흘러내린다.
  • 멀잖아. 플라타너스 잎도 지면
  • 청소차는 뒹구는 것들을 쓸어담겠지
  • 내 눈에는 지금 소리 없이 덮치는
  • 가을 쓰나미가 보인다.
  •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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