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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린(片鱗)
- 온종일 적막에 휩싸였다.
- 그곳에는 가끔 삼 판 트럭이 지날 뿐이었다.
- 거기는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없었고
- 전봇대 하나 서 있지 않았다.
- 햇빛은 무작정 쏟아지고
-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보드란 살이 까맣게 타도
- 강 건너 나무 그림자는 건너 오지 않았다.
- 바쁜 강물은 여울 소리를 냇가에 흘렸고
- 이름 모를 새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 유독 내가 사랑했던 달맞이꽃만
- 도랑 가에서 활짝 웃었고
- 땅굴을 뚫으며 다니던 두더지가
- 실수로 뒷마당에 기어 다니던 날에
- 나는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 동네 아줌마들은 콩밭에 숨어있고
- 남자들은 망태기를 지고 산으로 숨었다.
- 그런날에는 오래된 집이 두려웠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끼질 소리와
- 가끔 소(牛) 우는 소리가 앞산에 부딪히면
- 어린 나는 울던 울음을 그쳤다.
- 어머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멀리갔고
-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다릿골로 갔다.
- 나는 텅 빈 집을 버리고
- 파란 나비를 쫓아 풀밭을 헤맸다.
- 황금빛 노을이 지붕을 덮을 때면
- 냇가에 누워있던 암소가 걸어들어왔다.
-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편린(片鱗)이다.
-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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