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횡단보도에서
- 구름 몇 점 떠 있는 하늘 아래
- 그토록 아름답던 능소화는 모두 졌다.
- 아무도 심지 않은 나팔꽃이 전봇대 타고 오르다
- 제풀에 꺾여 스러지고
- 희끄무레한 낯선 꽃만 희미한 미소로
- 지나가는 길손을 쳐다본다.
- 스러져가는 계절에는
- 안타까운 사연이 사방에서 널려있다.
- 허리 꼬부라진 노인은 신호등 앞에 서
- 자신의 허리를 휘게한 시간을 쳐다보고
- 파지 줍는 할머니는 자신의 무게를
- 손수레에 싣고 힘겹게 끌려간다.
- 약봉지를 손에 들고 지팡이를 짚은
- 엷은 우수에 잠긴 노객(老客)이 가엽다.
- 시간에 쫓긴 귀뚜라미는
- 대낮인데도 건물 귀퉁이에서 운다.
- 이제는 태양 빛도 짙은 그늘에 쫓겨
- 아파트 지붕위에 모여앉았고
- 뇌력을 잃은 기계들만 붕붕 대며
- 미친 짐승처럼 도시를 활보한다.
- 경계석에 발을 얹고 잠시 바라본 가을은
- 기침 소리와 앓는 소리로 서글프고
- 담배 연기보다 더 자욱한 한숨 소리가
- 병든 가로수에서 흘러내린다.
- 멀잖아. 플라타너스 잎도 지면
- 청소차는 뒹구는 것들을 쓸어담겠지
- 내 눈에는 지금 소리 없이 덮치는
- 가을 쓰나미가 보인다.
- 2022,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