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눈(雪)
- 일렬로 서서 도시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에
- 함박눈이 벌떼처럼 덤벼들고
- 두꺼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들이
- 종종걸음으로 멀리 사라진다.
- 노량진역 앞길에 늘어선 플라터나스가
- 오돌오돌 떨던 그해 겨울에는
- 함박눈이 내가 탄 시내버스를 따라왔고
- 봉천동 달동네 재래식 화장실에
-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던 그해 밤에는
- 싸락눈이 나의 발등을 시리게 했다.
- 나는 지금 보도블럭에 내린 눈을 밟으며
- 아름답지 않았던 옛 추억을 떠올린다.
- 문풍지 파르르떨던 겨울 밤에
- 홋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떨던 어린시절이
- 차라리 아름답게 다가온다.
- 가난한 사람이 사는 동네에 내리는 눈은
- 전쟁터에 쏟아지는 연막 연기다.
- 가루눈이 언덕길을 지우던 밤에
- 연탄가스에 죽은 옆집 소녀 소식에
-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야 했다.
- 어느 해 시청앞 노숙자가
- 눈을 뒤집어쓴채 꽁꽁얼어있었다.
- 눈은 이렇게 밤새도록 내리려나
- 가여운 사람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 어디론가 실려가지 않으면 좋겠다.
- 오늘 밤 내리는 함박눈은
- 슬픈 기억을 많이 소환하고 있다.
- 2023.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