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間隔) 간격(間隔) 시인/박인걸 달과 해의 거리가 멀 듯 사람 사이에도 먼 거리가 있지만 별들이 모여 반짝이듯 가까워 행복한 사이도 있다. 해는 뜨거워 달아오르고 달은 차가워 시리니 둘은 만나면 불행하지만 별들은 서로 껴안을 때 즐겁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임계(臨界) 거리가 좋다는데 그대와 나의 거리는 어디쯤일까 가까이 하기엔 너무 아득하다 좁힐 수 없는 간격이라면 바라만 보는 것만도 행복하니 언제나 그 자리에서 도망하지 말아 주었으면 나의 창작시 2015.07.28
이 길 이 길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걸어가니 길이 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두렵지만 걸어갈 때 길이 되었고 가파른 절벽이라도 기어오를 때 길이 되었다. 걸어갔다고 모두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로 연결되어야 길이 되고 그 발자국을 따라 가야 길이 된다. 세상은 온통 길로 얽혔다.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쌓여서다. 처음 걸어간 사람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많은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처음 걸어간 사람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의 모험과 용기 때문에 이 길을 나는 편히 가고 있다. 길 위로 눈이 내린다. 하지만 길을 지우지는 못한다. 누군가 또 길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2015.2.28. 나의 창작시 2015.07.28
봄비 봄비(春雨) 메마른 나뭇가지를 적시며 사뿐히 내리는 봄비 이토록 촉촉한 날이면 내 가슴에도 봄이 온다. 봄비 내리는 날이면 마음은 고향 보리 밭길을 걷고 시냇가 낮은 언덕의 버들피리 소리를 듣는다. 한 겨울 먼지바람으로 너저분하던 가슴이 마음을 증류하는 봄비에 조용히 설거지 된다. 의식이 잠든 새벽부터 그리움을 불러오는 봄비야 가슴에 목련이 필 때까지 멈추지 말아주려무나. 2015.3.7. 나의 창작시 2015.07.28
그대 그대 내가 어느 날 그대 손에 끌려 아늑한 곳으로 인도 되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황홀한 빛을 보았어요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태초와 같은 신비함에 온 몸이 떨렸어요. 이후 그대는 나를 어디든지 이끌고 다녔어요. 드넓은 초원에서 가슴을 열어 주었고 산고랑에 흐르는 냇물소리 같이 속삭여 주었어요. 때로는 가파른 길로 이끌며 불끈 솟는 용기를 주었고 캄캄한 밤길에 나를 업고 갔지요. 그대와 사귀며 살아온 순간들이 나에게는 보석과 같아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어요. 그대가 내 곁에 있어 두렵잖고 당황하거나 겁나지 않아요. 영혼의 진액은 샘처럼 솟고 가슴을 메우는 분자의 열운동은 만족 이상으로 충만합니다. 오늘도 햇빛처럼 다가오는 그대를 설렘으로 맞이합니다. 언제나 오묘한 섭리로 예측불허의 디자인으.. 나의 창작시 2015.07.28
겨울 새 겨울 새 천 조각 하나 걸치지 못한 시뻘건 정강이에 긍휼 없는 강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도 겨울새는 얼음 위를 걷는다. 눈물도 말라붙고 목소리마저 얼어붙어 하늘을 향해 흐느껴 울 기력마저 쇠하여 버린 새는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걷는다. 무지갯빛 하늘을 날며 짝짓던 설레는 꿈을 털 깃에 깊이 숨기고 잔혹한 시련을 견디며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2015.3.17. 나의 창작시 2015.07.28
산비둘기 울음 산비둘기 먼동이 틀 무렵 산비둘기가 목 놓아 운다. 무엇이 저리도 슬퍼서 어둠 속에서 우는가. 아교풀 같은 응어리가 목구멍으로 넘어 올 것 같아 밤 새 잠 못 이루다 서러움이 북받쳤나보다 삶의 무게는 돌덩이 같고 출처모를 괴로움이 명치를 누를 때면 외로운 산비둘기는 가끔 운다. 새벽안개 자욱한 아주 오래된 벽돌집에서도 산비둘기 보다 더 서러운 새벽기도가 흐른다. 2015,4,25, 나의 창작시 2015.07.28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오월 산 라일락 꽃 향에서 어머니의 향취를 느끼며 흐르는 여울물소리에서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들립니다. 산 목련 꽃잎 같은 어머니의 순결함이 팔랑 나비 입 맞추는 제비꽃 겸양함에 고여 있습니다. 가지 끝에 피어나는 연한 햇순 같은 어머니여 숲을 지나는 실바람소리에서 어머니의 자장가가 들립니다. 깊이 구멍 난 가슴의 상처에 진한 눈물이 가득 고였어도 별빛을 쓸어 담아 영롱한 진주를 만드시던 어머니 패랭이 꽃 한 아름 안고 초록 풀 덮인 어머니 무덤으로 내 마음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늦봄이면 더욱 그리운 어머니! 2015.5.9. 나의 창작시 2015.07.28
질그릇 질그릇 어느 낡은 박물관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질그릇들이 옛 주인을 못 잊어 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어느 도공의 옹기가마의 뜨거운 불속에서 연단되어 작품이라며 인정받아 어느 집 밥상에서 사랑받았으나 도자기에 밀려 소박을 맞고 가슴 깊이 상처를 남긴 채 지금은 쓸쓸히 뒹굴고 있는가. 더러는 이가 빠지고 잔금이 거미줄처럼 얽혀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색깔마저 바랜 질그릇이여 황실에서 쓰임 받던 청자 백자 청화산수화조문이 못돼도 순수와 투박함으로 농부의 가슴을 덥혀주며 서민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던 모나지 않은 질그릇에서 나는 농부였던 내 아버지를 본다. 2015.7.18 나의 창작시 2015.07.28
희망 희망 태풍이 지나간 자리 중상을 입은 아카시아 나무가 쥐어뜯긴 나뭇잎들과 끝내 버티지 못한 느티나무를 보며 긴 한숨을 쉬고 있다. 피어나던 꽃들은 고개를 숙였고 연한 순들은 바들바들 떤다. 산사태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전쟁의 상처보다 더 크고 벼락 맞은 나무는 싸매는 주는 이도 없다. 희망은 바다 속에 가라안고 꿈은 진흙탕에 묻혔다. 하지만 참화를 맞은 숲은 정신을 차리고 넘어진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선다. 야생화는 더 진하게 피어나고 목이 꺾인 잡초에서 새순이 돋아난다. 헝클어진 숲은 제자리를 찾고 슬픔에 잠긴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드넓은 숲은 하나가 되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말없이 일한다. 하늘이 열려있어서다. 구름한 점 없이 활짝 열려있어서다. 뜨거운 여름 태양빛이 이글거리며 상처 입은 숲에 희망.. 나의 창작시 2015.07.28
잡초의 꿈 잡초의 꿈 짐승에 밟히고 때론 인간에게 밟혀도 잡초는 다시 일어선다. 조상 적부터 잡초로 살아와 밟히는 일에 이골이 났다. 자신들의 신분을 알기에 화초를 부러워하거나 인간들이 북돋아 주는 채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맨몸으로 태어나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까만 밤이면 두려움에 떨지만 아침 햇살을 기다리며 기나긴 시간을 견딘다. 농부가 휘두르는 낫날에 사정없이 몸이 잘려나가도 운명 앞에 굴복하지 않고 새 순으로 돋아나 저항한다. 잡초의 시들지 않는 꿈은 황무지에 꽃을 피우고 사막을 풀밭으로 바꾸며 삭막한 도시에 풀 냄새가 풍기는 자기들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전봇대와 콘크리트 담벼락까지 인간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 오고 싶어 오늘도 안간힘을 다해 울타리를 기어오르고 있다. 2010,10,8 나의 창작시 2010.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