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돌 배나무

신사/박인걸 2025. 2. 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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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 배나무
  •  
  • 내 소년 시절 안뜰에
  • 늙은 돌배나무 한 그루
  • 사계절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 붉은 진액을 빨아먹었다.
  •  
  • 봄이면 흰 나비 떼 같은 꽃잎이
  • 여름이면 수만 개 푸른 잎들이
  • 가을이면 고드랫돌 같은 돌배가
  • 나무 속살까지 갉아 먹고
  • 겨울이면 돌배나무는 알몸이 된다.
  •  
  • 비바람 휘몰아치던 밤에도
  • 한겨울 흰 눈이 쌓이던 밤에도
  •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
  • 늠름한 자세로 햇살에 빛났다.
  •  
  • 세월이 지난 어느 날
  • 바람에 난타당한 가지는 주저앉고
  • 추위에 찔린 가지는 말라가며
  • 벌레에 갉힌 밑동은 패이고
  • 계절을 잃어버린 나무는 스러졌다.
  •  
  • 그토록 강인하던 의지도
  • 서서히 시간에 깎여만 갔다.
  • 내어 주기만 하고 채우지 못한 나무는
  • 내 아버지처럼 그렇게 무너졌다.
  • 그리고 봄이 와도 다시 피지 않았다.
  • 202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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