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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시 67

십자가

십자가 빨간 네온의 십자가가 밤이면 도시 하늘에 내 걸리고 샛별이 스러지는 순간까지 어두운 도시를 밝힙니다. 망망대해의 등대보다 등산로의 길표보다 더 많은 것은 인생항로에 길 잃은 이들이 많아 촘촘히 걸어놓은 듯합니다. 더러는 붉은 십자가를 쳐다보며 상업주의를 운운하고 양 눈에 쌍심지를 돋우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방황하는 이들이 표지랍니다. 핏빛처럼 붉은 가슴으로 누군가를 진하게 사랑해 본 사람만이 밤마다 장미꽃처럼 피어나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 있답니다.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사는 영원한 대속(代贖)의 원리는 한 송이 새빨간 보혈의 꽃으로 피어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답니다. 2021.6.11

신앙시 2021.06.11

부활절 소고(小考)

부활절 소고(小考) 작년에 진 꽃은 올해 부활했고 가을에 진잎들이 형형(形形)의 모양으로 부활했다. 자연의 승계는 영원히 이어질 부활이고 같은 종(種)의 보존과 지탱은 끊임없는 재생으로 생태계는 생존한다. 최초의 생명체가 각각 종류대로 시작하여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건너온 끈기와 소멸하지 않으려는 생명체의 강력한 복사력이 보물처럼 깊은 곳에 숨어있다. 자연의 부활은 영적 부활의 그림자일 뿐 성자(聖子)의 부활이 참 부활이러니 절망의 돌무덤을 헤치고 사흘 만에 살아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희망이다. 어떤 이는 도난설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환상설을 주장했다지요. 기절설을 꺼내든 사람들도 있고 거짓 유포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신화설로 부활을 조롱한다해도 나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신앙시 2021.04.02

감람산의 기도

감람산의 기도 올리브나무 숲에는 달빛만 차갑고 베들레헴에 떴던 그별은 자취를 감추었다. 새들도 어느 처마에 밤잠을 청하고 달그림자마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아몬드꽃 달빛에 창백하고 감람 나뭇잎만 향기 짙은데 인기척 없는 동산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늦은 밤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차가운 바위에 꿇어 엎드려 흐느끼며 부르짖는 절규가 가슴 아팠다. 법치를 저버린 인간들마다 원죄의 굴레와 족쇄를 매단 채 처절하게 죽어가는 슬픈 운명을 서른세살 젊은이는 간과할 수 없었다. 타의에 의해 떠밀리지 않고 자의에 의한 숭고한 선택으로 십자가에서 죽어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결정이 고통스러웠다. “죽음의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신의 뜻이라면 달게 마시겠노라.”고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한 그는..

신앙시 2021.03.26

당신의 사랑

당신의 사랑 그 해 거기서 당신은 날 불렀고 나는 거절할 수 없어 답했습니다. 내가 보내는 곳으로 가라 할 때 몇 번이고 사양(辭讓)했지만 당신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습니다. 강권하기보다는 결단을 촉구했고 멍에를 씌우기 보다는 스스로 짐을 짊어지게 했습니다. 내 어깨가 감당하기엔 아주 버겁고 무겁고 큰 짐이었지만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뒤돌아보면 험한 길이었고 앞을 내다보면 아직도 아득한데 지나온 날들이 이력이 되어 이제는 하나도 겁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음성은 늘 감미롭고 성품은 내가 처음부터 흠모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힘은 당신의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나를 아끼고 귀중히 여겨준 당신의 아카페에 내 마음이 녹았습니다. 당신은 사랑의 화신(化身)입니다. 2021.2.14

신앙시 2021.02.13

나만의 임금

나만의 임금 내 마음 한 가운데 옥좌가 있고 그 자리에 임금 한 분이 앉아있습니다. 그분은 나한테 한 번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는 나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고 언제나 내 생각보다 앞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얼마나 겸손한지 나는 늘 머리를 숙이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에 감복합니다. 내가 나와 다툴 때에 항상 바른편에서서 빗뚫어진 생각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면 활짝 웃으시고 나쁜 일을 하면 온종일 토라져 계십니다. 위험한 곳에 섰을 때 내 팔을 꽉 잡아주시고 억울한 일을 만났을 때는 달래주십니다. 여러 번 나를 진토(塵土)에서 건져주셨고 딜레마에 빠질 때면 지혜로 모면하게 하십니다. 나는 나의 의지보다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살기에 걱정이 없..

신앙시 2021.01.15

셋째 하늘

셋째 하늘 하늘 위 셋째 하늘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고 그 언덕 너머에는 거룩한 도시가 있네. 이 세상에 없는 노래가 종일 흐르고 근심걱정하나 없어 웃는 사람들뿐이네. 하늘 위 그 하늘에는 수정 빛 강물이 넘쳐흐르고 그 강가에는 뿌리 깊은 나무들 즐비하네. 지상에는 없는 과일이 주렁주렁하고 옥보다 고운 풀에 구슬 꽃 출렁거리네. 유리 빛 바닷가 고요한 세상 진주 몽돌밭 눈이 부시고 황금길 보석마차 줄지어 달릴 때 부딪치거나 다칠 일 없으니 두려움 하나 없네. 진주 문 보석 성 찬란한 세상 꿈에도 그리던 이 세상에는 없는 나라 자유는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정의와 공평이 강처럼 흘러넘쳐 다시는 눈물이 없는 나라이네. 나 여기 머물고 싶네. 다시는 지상으로 가지 않으려네. 옥좌에 앉으신 이가 날 오라 하네. ..

신앙시 2020.12.01

나의 당신

나의 당신 아주, 아주 오래 전 봄날 냇가에 서 있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났소. 맑은 물에 비친 그대의 모습은 내 맘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노랗게 핀 생강나무 꽃향기가 풍겼지요. 잣나무 향기가 감성을 자극하던 여름 날 당신은 아침햇살로 내 등을 어루만졌지요. 황금빛 피나무단풍잎이 앞산을 감쌀 때 당신은 내 가슴을 뜨겁게 흔들었고 흰 눈이 황톳길을 하얗게 지우던 날 내 가슴에 오두막집을 지었지요. 떠나려는 당신을 나는 붙잡았고 그 날부터 우리는 둘이 하나가 되어 내 안에는 당신이 당신 안에는 내가 살지요. 나는 당신 앞에 자주 토라져도 당신은 내 마음을 매일 만져주고 별빛 같은 당신 눈빛에 내 가슴은 토담처럼 무너지지요. 시간은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 흘러 백 발 성성한 노인이 되었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와함께 ..

신앙시 2020.11.23

감사절 감사

감사절에 감사 봄날의 햇빛은 내 가슴을 흥분케 했고 밤하늘의 별빛은 내 양심을 선하게 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내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성서(聖書)이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당신의 진솔한 속삭임이었습니다. 어둠을 걷어내고 매일 새 하늘을 열어 나에게 무한한 희망을 선물하고 울창하게 우거진 한 여름 숲속에서 당신의 장엄함을 보았으며 세계의 명경치를 걸어 다니다 당신의 위대함에 울어버렸습니다. 슈퍼에 진열된 과일 코너에서 감, 사과, 배, 대추, 바다 건너온 과일에서 나는 당신의 속성을 읽었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당신의 손가락은 지식과 지혜의 기묘이며 불가사이입니다. 저녁녘 단풍 곱게 든 오솔길을 걷다가 당신의 가슴속이 들여다보여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기름기 자르르 흐는 햅쌀밥..

신앙시 2020.11.14

가을 감동

가을 감동 새빨갛게 익은 붉 나무 아래서 진한 감동에 콧등이 시큰 거리고 복자기 나무 핏빛 단풍잎에서 삶의 절정을 온 몸으로 느낀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의를 갈아입고 억만의 만장(挽章)을 펄럭이면서 장엄한 찬미 속에 진행되는 장례미사의 성스러움에 감탄한다. 골고다 언덕에 높이 달려 숙죄(宿罪)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타락한 중생(衆生)들을 살려내려 살신성인한 신의 아들만큼 고귀하다. 떠밀지 않았는데 오직 스스로 높은 장대 위에서 몸을 날려 한 마리 나비처럼 떠나버리는 그 고운 단풍잎은 붉은 넋이다. 우물쭈물 대거나 망설임 하나 없이 각각의 유언장 하나씩 품고 죽음에 도전하는 저 용기 앞에 가을바람도 숨을 죽인다. 2020.11.2

신앙시 2020.11.02

셋째 계절의 기도

셋째 계절의 기도 주여, 나도 영글고 싶습니다. 붉게 익은 수수가 고개를 숙인 것은 한 여름 뙤약볕을 온 몸에 칭칭 감고 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아섭니다. 주여, 나도 진실하고 싶습니다. 산자락 새빨갛게 물든 오손 단풍잎은 살아 온 이야기를 하나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털어놓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도 가난해지고 싶습니다. 산 까치 몇 마리 마른 정강이 드러내고 산열매 쪼아대는 눈빛에서 허리 굵은 내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주여, 나도 곱게 늙고 싶습니다. 샛노란 은행잎이 허공을 맴돌아 바람에 나풀대며 미련 없이 떠날 때 지나치지 않게 늙는 방법을 보았습니다. 주여, 내가 가진 것 다 주고 싶습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쏟아낸 후 빈 가지를 흔드는 밤나무에서 나누어 줌의 행복을 보았습니다. 훌훌 옷을 벗어 버..

신앙시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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