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독경(讀經)

신사/박인걸 2020. 6. 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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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경(讀經)

 

죽은 자들과의 만남은 경건하다.

비대면 대화이지만 면대면 이상으로 진지하다.

테이블에 앉아 활자 속에 걸어간 궤적을

면면히 살필 때면 초인(初人)의 얼굴이 보인다.

뱀의 감언이설에 홀딱 속아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선악과 꼭지를

상기된 얼굴과 떨리는 손으로 따던

이브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무 말 없이 아내가 건네준 열매를

한 입 베어 물다 목구멍에 걸린 아담이

게워내며 왈칵 울던 양심도 보인다.

남용 된 자유가 짊어지울 죄의 벌이 두려워

벌거벗은 몸을 풀잎으로 가리며

신(神)의 낯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치던

원조(元祖)인간의 발자국을 나는 따라간다.

짙은 나무그늘보다 더 검은 그늘이

원죄(原罪)인간얼굴에 길게 드리웠다.

원망과 회한이 뒤섞인 눈빛에는

이제부터 일어날 비극이 고이기 시작한다.

죄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가.

죄는 얼마나 추악한가.

죄에 따라오는 필벌(必罰)의 공포가

죽음보다 더 무섭게 머리끝을 곤두세운다.

인류 최초의 법(法)을 어긴 죄는

인간이 누릴 최상의 행복을 빼앗아갔다.

“정녕 죽으리라.”는 활자가

진한 색깔로 내 눈동자를 잡아당긴다.

20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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