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혼돈(混沌)

신사/박인걸 2023. 5. 31. 22:53

        혼돈(混沌)

  • 뒤돌아보면
  • 내 정신을 느릅나무 아래 세워두고
  • 한 마리 삽살개가 되어
  • 봄빛이 낙엽에 앉아 놀던 날부터
  • 흰 눈이 초가집을 삼킬 때까지
  • 길없는 벌판을 쏘다녔구나.
  • 한 번도 내 나이를 세지 않고
  • 구겨진 지폐를 펴지 않은채
  • 땟국물이 귀밑에 염색을 해도
  • 나는 정수리에 대못을 박으며 살았구나.
  • 내가 쓴 일기장에는
  • 불개미 떼가 줄을 서서 이사를 하고
  • 낡은 만년필 뚜껑을 열면
  •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꿈이 잠을 잤구나.
  • 닳아버린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 내 마음은 심하게 늙었고
  •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큰 사랑은
  • 깊이 숨겨놓은 비밀이구나.
  • 정리되지 않은 세간살이가
  • 병든 뇌 속에서 어지럽게 뒹굴고
  • 빠른 걸음으로 왕래하는 길거리에는
  •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구나.
  • 사십칠 년 전 오월 삼십일일은
  • 내가 공허와 혼돈에 빠지던 날이구나.
  •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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