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混沌)
- 뒤돌아보면
- 내 정신을 느릅나무 아래 세워두고
- 한 마리 삽살개가 되어
- 봄빛이 낙엽에 앉아 놀던 날부터
- 흰 눈이 초가집을 삼킬 때까지
- 길없는 벌판을 쏘다녔구나.
- 한 번도 내 나이를 세지 않고
- 구겨진 지폐를 펴지 않은채
- 땟국물이 귀밑에 염색을 해도
- 나는 정수리에 대못을 박으며 살았구나.
- 내가 쓴 일기장에는
- 불개미 떼가 줄을 서서 이사를 하고
- 낡은 만년필 뚜껑을 열면
-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꿈이 잠을 잤구나.
- 닳아버린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 내 마음은 심하게 늙었고
-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큰 사랑은
- 깊이 숨겨놓은 비밀이구나.
- 정리되지 않은 세간살이가
- 병든 뇌 속에서 어지럽게 뒹굴고
- 빠른 걸음으로 왕래하는 길거리에는
-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구나.
- 사십칠 년 전 오월 삼십일일은
- 내가 공허와 혼돈에 빠지던 날이구나.
- 2023.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