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눈에 대한 단상

신사/박인걸 2021. 12. 10. 23:20

눈에 대한 단상

 

잔뜩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우울한 그때 기억이 소환(召喚)된다.

바람이 후퇴한 마을에는

이어서 화산처럼 흰 눈이 쏟아지고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던 잡목(雜木)들은

체념한 채 순장(殉葬)된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산새들은

집 없는 하늘을 배회하다.

슬픈 노래마저 잃어버린 채로

초가집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

마을이 설국(雪國)이 되는 날이면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슬픈 사랑의 노래는 눈꽃처럼 피었다지만

추위에 헐벗었던 우리의 그 시절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언어가 없다.

작은 꿈마저 앗아간 핍절한 삶은

눈에 묻힌 나무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새봄이 오는 그날까지

움츠린 채로 체념해야 했다.

하얀 눈을 이고 서서 떨고 있는 나무처럼

짓눌려 주눅 들었던 우리는

오늘같은 날에는 가슴언저리가 저리다.

2021,12,12

 

'나의 창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바닷가  (0) 2021.12.13
연말의 기도  (0) 2021.12.11
의식(意識)의 도주  (0) 2021.12.07
불측지연(不測之淵)  (0) 2021.12.05
그해 겨울  (0) 2021.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