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나에게 쓰는 편지

신사/박인걸 2020. 7. 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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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오늘은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다.

고향 탈출 반 백년세월에 세상이 열 번 변했다.

비포장 뽀얀 먼지 길은 고속도로가 놓이고

산을 뚫어 뻗은 도로는 하룻길을 단(短)시간으로 줄였다.

굽이굽이 넘던 고갯길은 추억에 묻히고

초라한 길옆 오막살이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금강운수 직행버스에 두 살 아들, 아내와 나는

그 해 2월 눈 쌓인 아홉사리고개를 넘었다.

미래를 향한 모험(冒險)은 몸짓을 굳게 했지만

희망을 향한 도전으로 맘을 바꿀 때

공중을 나는 한 마리 행복한 새였다.

고단한 서울 생활은 매일 지치게 했지만

가슴속에 담은 꿈이 있어 심장이 달궈져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려

강산이 몇 번 변할 세월을 학문과 씨름하고

자주색 금색 술이 달린 박사모를 쓰면서 울먹였다.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많은 눈물을 쏟고

고독한 들판을 걸을 때 낙심했지만

아침마다 들려오던 어머니 기도소리와

희망을 풍구(風甌)질 해준 아내의 끈기가

나를 나 되게 한 견인차였다.

기어오르던 가파른 계단에서 휘청거렸고

한설(寒雪)을 맞으며 한강대교를 건너던 새벽 기억은

아직도 심장 언저리에 상처로 남아있다.

남들은 나를 입지전적이라 말하지만

아직도 나는 버리지 못한 꿈이 많다.

세 아들의 아내는 잘 익은 포도송이 같으며

궁전 식양(式樣)대로 다듬은 조각품 같은

손주들 재롱에 노년이 낙락(樂樂)하다.

어릴 적 추억을 자아올리는 분홍 접시꽃

벽돌 집 울타리 곁에서 활짝 웃고

고단할 때 위로를 주던 분홍 빛 자귀나무 꽃이

청아한 향기를 창가로 배달한다.

오늘은 삶이 보람 있다고 크게 느껴진다.

202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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