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도고(禱告)

신사/박인걸 2020. 6. 20.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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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禱告)

 

밤꽃이 피는 언덕에는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은 나뭇가지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청색 모자를 눌러쓰고 뒷산에 올라

뿌연 동네를 내려다보며 간절히 도고(禱告)한다.

그 손에 이끌려 들어온 이 도시에서

내 삶의 절반을 전제(奠祭)물로 살았다.

나의 간절함을 짓밟는 미워하는 눈동자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쏟아내는 외침을

애써 외면하는 낯빛에도 낙망하지 않았다.

나의 이름을 지저분한 발로 누르고

내 호소를 종이처럼 구겨 시궁창에 처박아도

태연한 미소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휘청거리는 사내들과

총명(聰明)을 잃고 밤새도록 배회하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아이들이

떼창을 부르며 버리는 아까운 시간들을

날마다 쓸어 담으며 안타까워했다.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민 계집들이

촘촘한 카페에 온종일 퍼질러 앉아서

쓸데없이 세월을 갉아먹을 때면

가슴에는 화덕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래도 나는 절망하지 않으며

넘어진 깃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 꼭대기에 붉은 깃발을 달았다.

어느 날엔가 제정신을 찾는 날이 오면

저 깃발에 푸른 별들이 달라붙을 것이다.

나의 도고(禱告)는 애원으로 바뀐다.

2020.6.20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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