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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인
거울 안에는 한 노인이 서 있다.
정수리까지 흰서리 내리니
무정세월이 원망스럽다.
첫돌사진은 잃어버렸더라도
기억 속에 얼굴은 꾸밈없는 꽃이었다.
비 온 뒤 태양이 구름을 찢을 때
소년은 무지개 위를 걸었다.
하얀 눈이 푸른 강물에 쏟아지던 날
그녀와 나는 한 배를 탔다.
스러지는 갈대밭을 지나
금광(金鑛)지대를 달려가며
우리 둘은 생손톱이 빠지도록 흙을 팠다.
그 자리에 황금(黃金)은 없었고
발길에 돌멩이만 허무하게 차였다.
내가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론은
나를 위한 책이 아니었다.
그럴 듯하게 그렸던 자화상을
갈기갈기 찢어 시궁창에 처박았다.
고락이 뒤섞이고 희비가 갈마드는
굴곡(屈曲)진 인생의 바둑판을 알듯하니
사람들이 나를 노인(老人)이라 부른다.
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세월과 싸워온 계급장이 이마에서 빛난다.
20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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