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연서(戀書)

신사/박인걸 2020. 9. 29.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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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戀書)

 

연정도 연서도 옛이야기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곱게 쓴 연서에

우표 한 장을 붙여 붉은 통에 집어넣고

설레는 맘으로 뒤돌아섰다.

우연히 알게 된 소녀(少女)의 주소로

내 마음을 가지런지 엮어 보냈는데

뜻밖의 날아 온 분홍 봉투에 난 소스라쳤다.

자전거 탄 우체부가 달려 올 때면

튀어나온 눈알은 자전거 바퀴와 함께 돌고

내 이름이 적힌 편지를 받아 쥘 때면

온 세상이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줄줄이 읽어 내려갈 때면 활자에 꿀이 흐르고

깊어지는 연정에 가슴은 발롱거렸다.

새빨간 고추처럼 익어가던 연서도

어느 날 전깃줄처럼 끊겼다.

젊은 날의 한 자락 행복한 추억으로

책갈피에 은행잎처럼 고이 간직한 채

세월은 자꾸자꾸 흐르고 또 흘러

연정도 연서도 빛이 바랬고

젊은 날 뛰던 심장 박동도 이제는 멎었다.

그리움도 애잔함도 기다림도 사라진

노인의 가슴속에는 농밀한 감회만 솟는다.

귀뚜라미 우는 계절이 오면

노인의 마음은 뒤숭숭하기만 하다.

오늘따라 가을밤은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20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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