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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나는 아직도 나그네이다.
뒤돌아보면 까마득한 길을 표락하며
낯선 이방 땅에서 서성이었다.
산천을 벗 삼아 유랑하지 못했다.
봇 짐 지고 남도(南島)를 떠돌지도 못했다.
협간에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갔다가
폭포수 노래하는 절경을 걷다가
새들이 속삭이는 숲속에 누웠다가
어느 주막에서 꿀물을 마시지 못했다.
줄자로 재면 뼘으로 잴 거리에서
커다란 쳇바퀴를 타고 여태껏 돌았다.
어느 가을 밤 풀벌레 소리가
나그네의 객수(客愁)를 불러일으킬 때면
길 잃은 나그네는 동공이 여러 번 풀렸고
어느 여름 햇볕이 정수리에 꽂힐 때
모래밭에 드러누워 담즙을 토했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 섰을 때
성난 파도는 나그네의 슬픈 노래를 빼앗았다.
외로운 싸락눈이 발등을 묻을 때
바람막이 없는 벌판길을 걸었고
정거장 하나 없는 오르막길 한복판에서
꺼이꺼이 울며 날을 새웠다.
발걸음은 멀기만 하고 행색은 궤탈사하지만
아직은 의지를 반(半)으로 접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숙명이기에
정수리에 숨겨놓은 시침(時針)이 정지하는 날까지
나그네는 그냥 나그네 길을 가련다.
20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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