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우체통

신사/박인걸 2021. 6. 8. 21:54

우체통

 

소년티를 막 벗어나던 시절

해맑은 소녀가 내 마음을 흔들어

고백할 수 없는 그리움을 활자에 담아

분홍 빛 봉투를 우체통에 넣고 나서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사방을 살핀 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갈 때면

가슴은 쌍방망이질을 하고

얼굴은 불을 쬔 듯 화끈 달아올랐다.

소녀가 내 편지 받아보면

웃을까 화를 낼까 못내 궁금해

온통 내 신경은 머리끝까지 곤두섰다.

빨간 자전거에 가죽가방을 실은

우체부 아저씨가 길 모퉁이를 돌아 올 때면

단숨에 달려 나가 쑥스러운 얼굴로

혹여 내 편지 소식을 물었었다.

시집, 소설책, 문학전집을 뒤적여

미사여구를 동원한 몇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끝끝내 답장은 오지 않았고

애꿎은 우체통만 발로 걷어찼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답장을 보내주지 않은 소녀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없다.

지금도 우체국 앞을 지날 때면

발로 걷어차던 그곳 우체통이 눈에 밟힌다.

2021.6.8

 

'나의 창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 계곡  (0) 2021.06.14
고사목 앞에서  (0) 2021.06.13
내 마음  (0) 2021.06.07
내 집  (0) 2021.06.06
초여름 풍경  (0)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