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그리움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수억의 나비 떼처럼 흰 눈은 날아내리고
은빛 세상으로 변한 언덕에서
나는 어느 꿈속 마을로 착각한다.
아주 어릴 적 걷던 산골길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나 혼자 작은 발자국을 남길 때
아늑했던 그 느낌이 오늘 되살아난다.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날에는
깊은 곳에 잠들었던 무수한 추억들이
노르웨이에서 보았던 폭포처럼
가슴을 마구 흔들며 일어선다.
눈보다 더 하얀 얼굴의 앞집 소녀가
우리 집 쪽으로 눈을 쓸며 오다
나하고 딱 마주칠 때면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고 싶었다.
웃음이 가득 고인 소녀의 눈은
하얀 눈빛 보다 맑게 빛났고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넋을 놓고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 소녀에 느꼈던 감정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애정이었고
눈이 오면 그 소녀가 생각나는 것은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202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