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내가 살던 집

신사/박인걸 2016. 11. 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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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 던 집

겨울이 뒷산에서 가장 먼저 내려오는 집
신작로에서 멀리 언덕위로 보이고
겨울 굴뚝으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를 때면
추운 참새들이 굴뚝 곁에서 몸을 녹이는 집
울타리로 심은 개 자두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고 아침마다 춥다고 소릴 질러도
마루 밑에서 잠잔 바둑이는 까치를 쫓지 않는 집
눈이 마당에 소복이 쌓이면
빗자루 들고 좁을 길을
맞은편 분이가 사는 집 대문 앞까지 쓸고 나면
수줍은 소녀가 대문을 열고 살짝 웃어주던 집
엄마가 구운 고구마에 뱃살이 오르고
강냉이로 쑨 물엿이 꿀보다 달아
뒷 광에 몰래 숨어들어가 훔쳐 먹던 집
고드름이 막대처럼 매달리면
시린 손으로 형과 칼싸움 하며
논 썰매 장에서 해가지도록
지칠 줄 모르고 달리다
고픈 배를 움켜잡고 달려오면
어머니가 붉은 팥죽을 쑤어 주던 집

봄이 제일 늦게 오는 응달에 지은 집
내린천 타고 올라오는 봄은
우리 동네까지 며칠 걸리는 집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개 살구꽃 무리지어 필 때면
내 살던 집 마당에도 분홍 매화가 피는 집
건넌 집 분이가 진달래 꺾으러 가자고 하면
설레는 발걸음 단숨에 달려가
한 아름 꺾어 안겨줄 때면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고
꽃송이 보다 더 흰 소녀의 손을 만져보고 싶던
그리움으로 가득한 집

뜨거운 태양이 마을 복판을 쬘 때면
아버지 대청마루에서 코를 골고
그늘에 누운 멍멍이도 혀를 빼들고 헉헉대던 집
오이냉국에 막국수 한 사발을
단숨에 집어 삼키며
감자 갈아 만든 부침개 네댓 장을
개 눈 감추듯 집어먹던 집
암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가
뒤쪽 말뚝에 매여 꼴을 먹고
모깃불 모락모락 오르는 저녁
마당에 깐 멍석위에 가족이 둘러앉아
호박잎에 된장을 발라
입이 터지게 쌈을 먹으며 저녁별을 세던 집
은하수 북에서 남으로 흐를 때면
소년은 은하수 머무는 곳으로 달려가고파
별똥별을 따라 가는 꿈이 있던 집
동네 아이들과 앞강에 뛰어들어
물 먹이며 헤엄칠 때면
앞 집 분이도 아랫 소에서 미역 감는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다
돌아 올 때면 나리꽃 한 송이 꺾어주며
손잡고 함께 오던 집

다섯 손 잎 단풍이 온통 앞산에 불타고
금빛 굴참나무 잎들이
카펫처럼 신작로 위를 물들일 때면
누런 볏단을 묶어 논둑에 쌓던
아버지 얼굴에 환한 웃음이 고이던 집
탈곡기 와룽와룽 돌면
동네 아저씨들 별이 지지 않은 새벽부터
달이 뜨는 저녁까지 도리깨질로 어깨가 쑤시고
흰 수건 두른 우리 어머니
하루 종일 키질에 두 팔에 알이 배던 집
콩단 팥단 묶어 쌓은 노적가리에
가을걷이 고단해도 힘들지 않다던 아버지
부지깽이도 뛰는 늦가을
앞집 분이가 빨간 고추를 마당에 널 때면
이유도 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가을 달 만큼 큰 박이
함석집 지붕에서 잠을 자던 집

어머니 손때 묻은 가마솥이
콩기름에 절여 반짝반짝 빛나고
뒤뜰 장독대 구수한 된장냄새 풍기고
여물 먹는 소를 보며 흐뭇해 하던 집
아궁이 연기에 까맣게 그을은 석가래가
정든 집을 떠받쳐 주던 집
지금 빈터만 남아
앞마당에 서 있던 미루나무만
옛 주인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집
지금도 꿈속에 찾아가 굴렁쇠를 굴리다
동네 친구들과 숨바꼭질 하는 집
내 소년시절이 정지된 채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
마지막 눈감으면 마을 뒷동산에
흰 가루로 뿌려져
영원히 잠들고 싶은 내 영혼의 그 집
그 집이 마냥 그립고나
20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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