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인물

성녀 클라라(Saint Clare of Assisi)의 영성

신사/박인걸 2024. 9. 10. 07:48

성녀 클라라(Saint Clare of Assisi, 1194-1253)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이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초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공동 창시자로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수도자의 삶과 가난의 이상을 실천하며 여성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가난한 클라라회(또는 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했다.

1. 생애

성녀 클라라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부유했지만 클라라는 어릴 때부터 세속적인 부와 권력보다는 경건한 신앙과 가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젊은 시절 클라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가 가르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실천에 이끌려, 그녀는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수도 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

1212년, 18세의 클라라는 가정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수도 서원을 하였다. 당시 여성의 수도 생활은 매우 드물었으며, 특히 클라라가 서원한 가난과 검소한 삶은 여성 수도사들에게 매우 혁신적이었다.

2. 업적

성녀 클라라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받아들이고, 여성 수도 공동체인 가난한 클라라회(Poor Clares)*를 창립했다. 그녀는 수도회 설립 후 40년 동안 아시시에서 수녀회 생활을 이끌었다. 이 수도회는 ‘절대적인 가난’을 추구했으며, 소유물을 전혀 가지지 않고 오직 자선으로 생활하였다.

가난한 클라라회의 헌장은 특히 가난의 규율을 엄격히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클라라는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가 어떠한 재산도 소유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으려 노력했고, 이를 이루어냈다. 이는 그녀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성녀 클라라는 수녀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기도와 묵상을 중심으로 한 깊은 영적 삶을 살았다. 그녀는 병약한 몸으로도 끝까지 수도 공동체를 돌보고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특히 그녀는 자신과 수녀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격려했다.

3. 영성

성녀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칸 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가난, 겸손, 복음적 삶이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녀는 예수님의 가난한 삶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가난의 영성은 단순히 물질적인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클라라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깊은 묵상을 중시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 사랑의 무한함을 깨닫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 힘을 얻고자 했다.

또 다른 클라라의 중요한 영적 특징은 성체에 대한 깊은 신심이었다. 그녀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을 체험하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특별히 중요시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클라라는 아시시를 침공한 사라센 군대로부터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체를 들고 기도함으로써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유산과 영향

성녀 클라라는 자신의 삶과 영성을 통해 수도 생활에 헌신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수도회인 가난한 클라라회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성녀 클라라의 영성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는 클라라가 병석에 있을 때 기적적으로 성탄 미사를 멀리서 본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5.  클라라와 프란시스코와의 관계

성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의 관계는 영적 동반자이자 지도자로서 매우 깊고 중요한 관계였다. 두 사람은 모두 아시시 출신으로, 프란치스코가 먼저 가난과 복음적인 삶을 추구하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고, 클라라는 그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아 그의 길을 따랐다.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교회 안에서 가난의 이상을 실천한 동반자였다.

1) 영적 스승과 제자

성녀 클라라가 프란치스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210년경,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서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할 때였다. 당시 프란치스코는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혁신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클라라는 그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도 가난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1212년, 클라라가 가정을 떠나 수도 생활을 결심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보호하며 아시시 외곽의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첫 서원을 받도록 도왔다. 그는 클라라가 여성으로서 수도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그녀가 지도자로서 수도 공동체를 세우는 데 필요한 지혜와 조언을 제공했다.

2) 공동체 설립과 협력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영적 지도 아래 처음 서원을 하고 난 후,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돕기 위해 성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클라라는 점차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프란치스코의 프란치스칸 형제회와 같은 가난을 실천하는 여성 수도 공동체인 가난한 클라라회(또는 클라라 수녀회)를 창립했다.

두 사람은 각자 남성과 여성 수도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세웠지만, 그들의 이상과 목표는 동일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모두 가난과 겸손, 사랑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들은 서로를 영적으로 지지하며 힘을 주는 동반자였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통해 프란치스칸 영성이 여성에게도 확산되는 것을 보며, 그녀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클라라 역시 프란치스코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만의 공동체를 이끌어나갔다.

3) 영적 교류와 우정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깊은 영적 우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공유했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프란치스코가 가난과 복음을 실천하며 겪은 어려움 속에서도 클라라는 그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특히 프란치스코가 말년에 시력을 잃고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클라라는 그를 돌보고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의 깊은 일치를 이루고자 했다.

또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수립한 프란치스칸 이상을 여성 수도자들에게 맞게 발전시키며, 이를 실천하는 데 있어 독창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의 가난에 대한 헌신과 공동체 운영 능력을 존중하며 그녀에게 수도회를 이끌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했다.

4) 죽음 이후의 관계와 영향

프란치스코는 1226년에 선종했고, 클라라는 그 이후에도 27년 동안 가난한 클라라회를 이끌며 그의 이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프란치스코의 죽음 이후에도 클라라는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가 추구했던 가난과 복음적 삶을 여성 수도자들에게 확산시켰다.

프란치스코의 영향은 클라라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클라라 역시 독립적인 영적 리더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녀는 수도 생활의 규칙을 세우는 데 있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되, 여성의 특성과 상황에 맞게 수도 규율을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가난한 클라라회는 독자적인 수도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결론

성녀 클라라는 자신의 삶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한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으며, 여성 수도자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영성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을 넘어서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강조한다.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녀는 교회 역사 속에서 복음적 가난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그녀의 헌신적인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