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성화(聖化)
까마득한 시간의 기억들이
아직은 공백 건망증에 갇히지는 않았다.
산도토리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던
질맷재 길을 걸어 넘을 때
무릎연골이 여물지 않아 보폭이 좁아도
늙은 자작나무 굽어보는 정상을 향해
작은 아이는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 후 보폭이 길어진 나는
아주 오랜 세월의 풍상을 밟으며
황사바람 부는 세상을 쫓아다니는 동안
반반하던 이마에 주름은 깊고
청아하던 발음에 바람이 새는 소리가 난다.
두 손에 움켜쥐었던 시간들이 지금은
내 영역을 벗어나 따라잡을 수 없다.
꽃잎에서 풀잎으로 그리고 단풍잎으로
잔나비처럼 뛰어다니는 시간은
알맹이는 몽땅 쓸어가고
온갖 죽정이 들만 내 발 앞에 던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삶의 껍데기들만
차곡차곡 시간의 무대에 쌓였다.
시간을 성화시키지 못한 나는
결국 시간의 포로가 된 채 질질 끌려간다.
뒤돌아보면 삶은 결국 시간과의 다툼이었고
어지간한 자는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생과 사를 틀어쥔 시간 앞에
오래산 자들은 처분만 기다릴 뿐이다.
202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