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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땅
처음 이 땅을 딛던 날엔 비가 내렸고
진창길 짓밟을 때 질퍽거려도
움푹 파인 발자국마다 꿈을 채우며
마을 복판에 붉은 등불을 달았다.
띄엄띄엄 새 나오는 마을 불빛과
밤이면 맹꽁이 울어대는 낯선 지대는
정붙이며 살아갈 영토는 아니었어도
세워놓은 말뚝에 내 의지를 매달았다.
낯선 사람들만 오가는 거리에서
오로지 하늘에 내 소망을 걸어두고
구둣발 밑창이 닳도록 걸으며
화전 밭 일구듯 맨 땅을 파냈다.
한 해 두 해 그렇게 서른다섯 해
내 일기책 절반이 이 동네 이야기다.
고향 땅에 묻은 시간들과
어느 객지에 걸어 놓았던 날들보다
여기서 살아 온 세월이 가장 길어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숫한 사연들이여
나 이제 여기를 떠나도
내 마음은 저 언덕위에 걸어두리라.
또 다시 낯선 땅을 밟고 살아도
정든 이 동네를 가슴에 담아두리라.
골목길, 사거리, 내가 수시로 드나들던
은행, 약국, 병원, 그리고 시장길
길거리서 만나던 낯익은 얼굴들
매일 머리에 이고 살던 저 푸른 하늘과
밤마다 어둠을 밝히던 붉은 십자가
내 영혼의 절반을 놔두고 가리라.
20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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