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기억의 피난처
여기쯤에서 뒤를 돌아다보니
굽이굽이에 가려진 세월의 끝은
기억의 휴지통에 팽개치고
호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던 추억들만
가끔 꺼내어 들여다보면 행복하다.
한 사람의 짧은 역사이지만
내 중세에 저장된 기억보다는
초기의 발자국들이 더 아름답다.
부딪쳤던 일들은 상처가 되고
빼앗겼던 것들은 고통이 되었다.
이루지 못한 아픔들은 눈물이 되어
깨지지 않은 병에 채워졌지만
꺼리길 것도 꾸밈도 없던 시절
흙냄새 진동하던 언덕을 밟던 때는
푸른 하늘보다 더 맑은 영혼이었다.
지천으로 널려 피던 꽃송이들은
내 얼굴을 비비며 뒹굴던 동무들이었고
유리 빛 냇물은 마음을 씻어주는
내 넋의 맑은 성수(聖水)였다.
흙냄새와 솔향기에 절어 붙어
내 혼은 동심의 포로가 되었어도
현실의 치열한 전장에서 피할 수 있는
정신의 도피처가 있어 다행이다.
가끔 고통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이면
타임머신에 올라 그 시절로 숨는다.
기억의 피난처가 있어 행복하다.
2021.1.2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