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기억의 피난처

신사/박인걸 2021. 1. 2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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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피난처

 

여기쯤에서 뒤를 돌아다보니

굽이굽이에 가려진 세월의 끝은

기억의 휴지통에 팽개치고

호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던 추억들만

가끔 꺼내어 들여다보면 행복하다.

한 사람의 짧은 역사이지만

내 중세에 저장된 기억보다는

초기의 발자국들이 더 아름답다.

부딪쳤던 일들은 상처가 되고

빼앗겼던 것들은 고통이 되었다.

이루지 못한 아픔들은 눈물이 되어

깨지지 않은 병에 채워졌지만

꺼리길 것도 꾸밈도 없던 시절

흙냄새 진동하던 언덕을 밟던 때는

푸른 하늘보다 더 맑은 영혼이었다.

지천으로 널려 피던 꽃송이들은

내 얼굴을 비비며 뒹굴던 동무들이었고

유리 빛 냇물은 마음을 씻어주는

내 넋의 맑은 성수(聖水)였다.

흙냄새와 솔향기에 절어 붙어

내 혼은 동심의 포로가 되었어도

현실의 치열한 전장에서 피할 수 있는

정신의 도피처가 있어 다행이다.

가끔 고통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이면

타임머신에 올라 그 시절로 숨는다.

기억의 피난처가 있어 행복하다.

20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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