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세모(歲暮)

신사/박인걸 2020. 12. 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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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歲暮)

 

세모를 맞아도 거리는 붐비지 않는다.

코로나가 창궐한 도시는 비둘기들도 도망쳤다.

마스크 사이로 내비치는 경계의 눈빛들이

전선 병사의 눈초리보다 더 매섭다.

연일 튀어 나오는 확진 자 숫자와

앰뷸런스의 다급한 사이렌이 고막을 가를 때면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심정이다.

달력의 마지막 숫자가 지워지던 날에는

한 해를 조용히 갈무리하며

다가오는 시간들을 설계도면에 그려 넣고

두 손을 모으고 예배당에 앉아

세 가지 소원을 적어 간절히 기도했었다.

보신각 종소리가 광화문 벌판에 퍼질 때면

Auld lang syne을 힘주어 부르며

지인과 어깨동무를 한 채

불빛 찬란한 도시를 휘젓던 시절도 있었다.

생애 처음 당하는 팬데믹 공포에

표범에 쫓기는 가젤이 되어

새해의 경계선을 두 발로 밟으면서도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

2020년의 세모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202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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