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시

셋째 계절의 기도

신사/박인걸 2020. 10. 25. 08:55

셋째 계절의 기도

 

주여, 나도 영글고 싶습니다.

붉게 익은 수수가 고개를 숙인 것은

한 여름 뙤약볕을 온 몸에 칭칭 감고

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아섭니다.

 

주여, 나도 진실하고 싶습니다.

산자락 새빨갛게 물든 오손 단풍잎은

살아 온 이야기를 하나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털어놓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도 가난해지고 싶습니다.

산 까치 몇 마리 마른 정강이 드러내고

산열매 쪼아대는 눈빛에서

허리 굵은 내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주여, 나도 곱게 늙고 싶습니다.

샛노란 은행잎이 허공을 맴돌아

바람에 나풀대며 미련 없이 떠날 때

지나치지 않게 늙는 방법을 보았습니다.

 

주여, 내가 가진 것 다 주고 싶습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쏟아낸 후

빈 가지를 흔드는 밤나무에서

나누어 줌의 행복을 보았습니다.

 

훌훌 옷을 벗어 버리고

찬 겨울로 걸어 들어갈 나목들의

저 늠름한 용기에 감탄하며

어떤 충동에도 천연스럽게 하소서.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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