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수액
가을이면 단풍잎 곱게
산을 온통 불태우는 고로쇠나무가
이른 봄날 고운 꿈을 꾸더니
갑자기 드릴로 허리를 뚫려
수액(水液)을 강탈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먼 조상 적부터 외롭지만 고결하게
고로(孤露)쇠 나무로 살아 왔더니
잔인한 직립보행자들의 탐욕에
고로(苦勞)쇠 나무로 운명이 바뀌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보혈은
온 인류의 죄를 씻는다지만
몇 푼 지폐에 눈먼 강도들에 의해
수액은 거래(去來)가 된다.
재작년의 상처에서 아직 고름이 흐르는데
또 몇 개의 빨대를 꽂으니
목재(木材)의 꿈은 멀리 사라졌고
지탱할 용기마저 잃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구멍에 바람이 새고
상처에서 일어나는 통증은
발을 동동 구르게 한다.
도망칠 수 없는 나무는 오늘도
물통을 들고 다가오는 물 강도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2018.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