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작시

흐린 날

신사/박인걸 2023. 8. 17. 17:33
  • 흐린 날
  •  
  • 지친 구름이 리첸시아에 앉아
  • 도시 풍경에 젖어든다.
  • 곰배령을 걸어서 넘던 그해
  • 나를 미궁으로 몰아넣던 구름이 아닐까.
  • 푸른 하늘을 집어삼키고
  • 이글거리는 태양을 흑막(黑幕)에 가두는
  • 구름의 힘을 나는 비웃는다.
  •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 이런 날에는 아득했던 그 날이 소환된다.
  • 온종일 두 다리로 걸으며
  • 용산 굴다리를 수없이 왕복했다.
  • 맑은 날도 흐린 날이었고
  • 흐린 날도 나에게는 흐린 날이었다.
  • 한 번 만나면 헤어질 사람들과
  • 영원히 기억나지 않을 대중 사이로
  • 낡은 수레 하나에 짐 보따리를 싣고
  • 버스 정류장까지가 내 임무였다.
  • 성프란시스고의 자서전을 읽으며
  • 성인(聖人)의 삶을 동경하며 입학한
  • 한 선지 생도의 현실은
  • 막노동의 현장에서
  •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자존심은 짓밟혔다.
  • 낡은 담벼락 아래 앉아 망연히 바라본
  • 그날 허공에는 검은 구름이
  • 나의 꿈을 집어삼키며 비웃었다.
  • 을쓰년스런 도시 바람이 귓불을 스칠 때
  •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 내면(內面)의 강한 음성이 나를 독촉했고
  • 세월의 강을 건너 그 날을 반추할 때
  • 약한 그 시절이 유약한 자아를
  • 강한 나로 만드는 담금질이었다.
  • 지금은 흐린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 202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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