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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아침부터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기상대의 예보를 불신하지 않았다.
소한(小寒)녘 밤은 일찍 도시를 점령하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밤 벌떼들이 날아들 때
나는 그것이 폭설인 것을 알았다.
어두움이 지운 도시를 눈은 그 위에 덧칠을 한다.
검정색과 흰색의 기막힌 절묘이다.
두 장막이 내린 거리는 아늑하지만
썰매를 타는 차들이 아슬아슬하다.
매서운 한파가 살갗을 도려내지만
어릴 적 추억에 사로잡힌 나는 싫지 않다.
수많은 폭설이 나를 덮었지만
나는 한 번도 눈 속에 매장되지 않았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죽음을 위한 재앙이 아니라
흙속에 꿈틀대는 생명을 덮는 손길인 것을
나는 철들던 때에 깨달았다.
이런 폭설은 시들시들한 감성을 부추기고
마을 앞산을 순식간에 산수화로 바꾸던
잊지 못할 추억을 되살려주어 기쁘다.
지루한 영혼이 속으로 곪을 때
신년 초에 쏟아지는 잠시의 위로가
조각난 에네르기를 다시 모으고 있다.
내가 열 살 만 젊었어도 길거리로 달려나가
쏟아지는 눈을 얼굴에 비비며
사랑했던 소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거다.
도시가 마비된대도 개의치 않을테니
폭설이여 멈추지 말아다오.
20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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