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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역에서
내가 머물던 곳은 모두 역(驛)이다.
봄날 머물 던 역에는 진달래가 곱게 피었지만
여름에 머물 던 역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잊을 수 없는 역은 겨울역이었다.
앙상한 플라다나스는 길가에서 떨었고
코트 깃을 세워도 바람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얀 눈이 지운 철길에는
기다리던 열차가 오지 않았고
밤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침(時針)은
가슴에 고인 불안을 작두우물처럼 퍼 올렸다.
어디론가 가야야 할 소녀는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성애 꽃 핀 유리창에 하얀 입김을 불었다.
내가 갈 곳은 귀향(歸鄕)이 아니라
반겨 줄 사람 없는 미지의 역이다.
거기서 다른 열차를 갈아타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곧 도착할 열차는 나를 싣고 떠나겠지만
새 세상을 찾아 나선 나는
항상 외로운 나그네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가을 역에 도착하고 싶다.
은행잎 융단이 두껍게 깔린 길을
갈색 바바리 깃을 바짝 올리고
아직 지지 않은 단풍잎의 환영을 받으며
내 발자국을 거기에 남기고 싶다.
열차 바퀴 마찰음이 자장가로 다가온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꿈길을 걷는다.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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