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세월(歲月)
세월은 철(鋨)로 만든 신을 신고
안단테의 걸음으로 일정하게 걷는다.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눈보라가 앞길을 가로막고
사나운 기압골이 멀리 밀어내며
여름 햇살이 바닷가로 유혹해도
고정된 눈동자로 시계바늘처럼 돈다.
세월은 양손에 시퍼런 칼을 들고
어명(御命)을 따르는 집행관이 되어
살생부에 입력된 이름만 골라
소리 없이 목을 자른다.
중세 흑사병 보다 더 잔인(殘忍)하고
몽골군만큼 인정 사정하나 없다.
거대한 타작기계에 걸려들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안개가 된다.
벽돌담에 기대어 곱게 핀 백일홍이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시지만
세월(歲月)이 추분에 보낸 사자(使者)에게
분홍색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
어느 날 내 목에도 칼을 겨눌 것이다.
2020.9.1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