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지친 구름이 리첸시아에 앉아 도시 풍경에 젖어든다. 곰배령을 걸어서 넘던 그해 나를 미궁으로 몰아넣던 구름이 아닐까. 푸른 하늘을 집어삼키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흑막(黑幕)에 가두는 구름의 힘을 나는 비웃는다.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이런 날에는 아득했던 그 날이 소환된다. 온종일 두 다리로 걸으며 용산 굴다리를 수없이 왕복했다. 맑은 날도 흐린 날이었고 흐린 날도 나에게는 흐린 날이었다. 한 번 만나면 헤어질 사람들과 영원히 기억나지 않을 대중 사이로 낡은 수레 하나에 짐 보따리를 싣고 버스 정류장까지가 내 임무였다. 성프란시스고의 자서전을 읽으며 성인(聖人)의 삶을 동경하며 입학한 한 선지 생도의 현실은 막노동의 현장에서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자존심은 짓밟혔다. 낡은 담벼락 아래 앉아 망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