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충만한 가정(룻1:11-18)
남녀가 이성적 사랑에 빠질 때 뇌에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강하게 활성화되면서 뇌는 격렬한 에너지와 함께 강한 흥분작용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은 활력이 넘치고 기쁨이 최고조에 달하며 웃음이 많아지고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도파민은 가장 강력한 자연이 만든 각성제로서 일종의 마약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증상이 비슷합니다. 소위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도파민의 분비 기간은 30개월이랍니다. 이후에는 도파민이 강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적이도 30개월 이내에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보지 못하면 이후부터는 연인관계가 끝나거나 각가지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동체 중에 가정이 가장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혈연공동체, 정서적 공동체, 신앙공동체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세상만사가 행복하고, 가정이 불행하면 세상만사가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행복한 가족의 8가지 조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① 가족 가치관, ② 헌신과 소통, ③ 지원과 지지, ④ 바른 자녀교육, ⑤ 융화, ⑥ 갈등 해결, ⑦ 회복, ⑧ 휴식, 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덧붙여서 ⑨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의 가정이 이런 조건을 갖춘 가정이 되기 원합니다.
오늘은 가정 주일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룻의 가정, 아니 나오미의 가정을 통해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이 되는 길을 알아보며 합니다.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며 행복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을 떠난 가정의 비극입니다.(룻1:3-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3-5)
베들레헴에 기근이 왔습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리고 기룐과 말룐 이렇게 네 식구는 기근을 피해 모압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룐과 말룐은 오르바와 룻을 각각 아내로 얻어 잘 살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이 가정에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을 시작으로 하여 기룐과 말룐, 세 남자가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모릅니다. 혹시 전염병에 의해 죽었거나 사고를 당해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정에 남자만 세 명이 사망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 가정은 큰 불행을 만났던 것입니다. 결혼한 남자 셋이 죽은 것은 그 가정에 세 명의 과부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참 불행한 일이 발행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일반론 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비극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기근은 시험을 뜻합니다. 그 가정에만 기근이 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정에도 기근이 왔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전체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런데 모압으로 이주한 가정은 이 가정밖에 없습니다. 베들레헴 사람이 모압, 이방 땅으로 이주한 것은 죄입니다. 죽어도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죽고, 살아도 그 땅에서 살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살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이방 땅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현재로 재해석하면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인간적인 판단을 앞세워서 세상 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이 가정에 비극이 왔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해도 이 문제를 신앙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 불신앙 적인 바방법,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비극이 올 수 있습니다. 재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처럼 불신자들이 사는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문화를 수용하며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우리의 영적 삶을 황폐해지고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말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친다고 해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의 삶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 큰 불행을 만난 이 가정이 다행히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은혜가 임합니다.(룻1:6-7)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6-7)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더이상 모압 땅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잘한 일입니다. 정서와 문화, 그리고 현실적으로 모압에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 땅에 뭣하러 살겠습니까? 나오미의 결심은 현실적인 결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결심은 영적인 결심이요. 신앙적 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결심은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살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은 시련과 고난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압 땅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살줄 알았지만 그 땅에서의 삶을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오미가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이제 그곳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두 자부도 나오미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합니다. 자식도 없는 몸으로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에 설득을 받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오미의 설득에도 완강한 룻의 주장을 나오미는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룻이 나오미가 가문에 큰 복덩이였습니다. 그 여인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홈런을 칩니다. 보아스라는 그 지역의 가장 유명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이 가문에 이스라엘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훗날 예수님이 오십니다. 나오미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탕진한 후에 자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허물을 묻지 않았습니다. 벌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었습니다. 그는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가정 식구들에게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이방 땅에 이사 와서 세 명의 남자를 잃고, 재산을 잃고 모든 것을 잃는 불행을 만났지만 룻이라는 효부를 얻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설득을 끝까지 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가 자신의 자라가 될 것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는 일 외에는 어머니와 자신을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결심과 믿음을 가진 며느리 룻을 나오미는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가정에 보내 주신 복덩입니다. 축복입니다.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잃을 때도 얻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손해를 볼 때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망했을 때도 얻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에 처할 때도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탄식할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하게 하시다가 고쳐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게 하시다가 닦아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병들게 하시다가 고쳐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곤경에 처하게 하시다가 다시 웃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입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은총을 베푸십니다. 상상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십니다. 혹시 하나님을 떠난 분이 있습니까? 주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 우리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큰 은총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임한 가정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 은혜가 임한 가정의 삶의 방법을 알아봅니다. (룻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
나오미 가정이 다윗 가문의 주인공이 된 과정과 예수님 족보에 오르게 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룻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엘리멜렉 가문의 이방 화에서 이 가정에 비극이 왔습니다. 율법은 이방 민족과의 결혼을 금했습니다. 고향 땅에 가뭄이 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이방 땅을 찾아간 것이 율법을 어긴 것이고, 그 땅에 가서 사는 동안 그 가정은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얻었습니다. 그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율법을 범한 죗값일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일은 잘한 일입니다. 그 땅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모압에서 시집온 룻이 나오미의 며느리로 사는 동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드렸습니다. 이방 여인의 신앙이 베들레헴 사람들의 믿음보다 더 좋았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어머니의 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어머니의 종교를 자신의 종교로, 어머니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을 생각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민의식이며, 선민으로 살겠다는 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녀는 죽는 일 외에는 자신의 고백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둘도 없는 효녀였습니다. 우리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이 보다 더 효녀였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를 위하여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온동네에 마음 착한 여인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남자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결국, 베들레헴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던 보아스에게 시집을 갑니다. 그들의 고엘 제도에 따라 보아스는 나오미 남편이 가졌던 토지와 집을 모두 돌려받게 해주었습니다. 룻은 그 가문에 복덩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님의 먼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룻은 이방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선교적 구원의 구약 모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이 가문에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가 임한 가정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부모가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안타까운 뉴스가 있습니다. 가족의 동반자살 사건입니다. 또는 부모가 어린 자식을 죽이는 보도가 나오기도 합니다. 30대 젊은 여자가 자신의 남편을 계곡에 데리고 가서 헤엄을 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기 위하여 강물에 들어가게 하여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요즘 남편이 말을 잘 안들으면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답니다. “당신 나하고 계곡에 갈래!!”엽기적인 사건입니다. 쉽게 이혼을 하는 가정이 수없이 많습니다. 물론 이유가 있어서 가정이 해체되지만, 그 자녀들이 받는 정서적인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악한 시대에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녀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배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 읽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목사님을 잘 섬기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말과 행실에 덕을 세우며 사는 모습을 보야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믿음 위에 설 수 있습니다.
릴레이 경주에서 앞의 주자가 뒷 주자에게 바톤을 제대로 인계해야 합니다. 바톤을 땅에 떨어트리면 아무리 잘 뛰는 선수라고 해도 그 경기에서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부모는 그 가정에서 다음 세대로 바톤을 넘기는 주자와 같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룻은 나오미 가정에서 며느리로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찬송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나오미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 것입니다. 나오미의 철저한 신앙의 본이 룻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를 통해 축복이 회복된 것입니다. 로잇, 유니게의 신앙의 본이 훌륭한 디모데를 낳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이시여, 자녀들에게 철저하리만큼 신앙의 본을 보여 다음 세대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힘쓰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에 예수를 믿으면 빛의 자녀가 됩니다. 빛의 자녀로서 살려면 성령 충만이 필수적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육신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즉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롬12:1) 성령 충만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온전히 표현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9-21절에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이 5개의 분사형으로 언급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하였습니다. 특히 성령 충만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종은 원래 노예에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노예는 자기의 의지나 사정에 상관없이 주인에게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노예는 매를 맞기도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자세인 ‘복종’이란 단어를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적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형제들과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여라.”(갈5:1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종은 누구의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복종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 안에서 가족들이 평강을 누립니다. 그런 문화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사사기 시대의 사건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일가도 당시 문화를 쫓아 살다 보니 모압 땅에 간 것입니다. 이방 땅에 가서 비극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 가정은 신앙이 회복되었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재물이 회복되었습니다. 신분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모두 회복하였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좋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풍성한 가정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022년 5월 15일 가정주일 3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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