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박인걸 2020. 8. 16. 16:15

벌판

 

끝이 안 보이는 벌판에 나는 서있다.

뒤를 돌아보아도 끝이 없고

앞을 내다보아도 아득하기만 하다.

지루한 걸음을 걸어 나 여기 서 있지만

이제는 지쳐 자신감을 잃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여러 계절을

헤집으면서 걸어왔지만

나에게는 버겁지 않은 계절은 없었다.

더러는 낭만을 즐겼을 테지만

풀벌레 노래도 나에게는 소음이었다.

폭우가 내리던 한 여름의 지루함과

폭설에 길을 잃고 헤맸던 기억이

찢어진 천 조각처럼 눈앞에 나부낀다.

스쳐가는 사람은 있어도

동행하는 친구는 나에게 없었다.

밤하늘에 별을 세다 벌판에서 잠들었고

한 여름 어느 풀 섶에서

이슬을 맞으며 그날 밤을 보냈다.

나는 이제 벌판이 싫다.

지루한 내 발자국 소리도 듣기 싫다.

짚었던 지팡이마저 닳아

이제는 막대기도 나에게 짐이 된다.

비온 후 동쪽 하늘에 무지개가 떠도

닫힌 내 가슴에는 그림일 뿐이다.

석양 붉게 물든 노을도

늙은 나에게는 가여운 노래일 뿐이다.

오늘따라 벌판에 바람이 분다.

쉴 곳 없는 내가 아주 많이 가엽다.

2020.8.16